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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3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대비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사건을 기술합니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2사무 5,1).

사울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중심으로 왕정을 이어가고, 다윗은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2사무 2,4 참조) 자기 집안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로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의 싸움이 지속되다가 이스 보셋이 죽은 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와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을 하는 대목이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한 민족이지만 불안정한 왕정 체제 수립 시기에 갈라진 그들이 다시 하나됨을 꿈꿉니다.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견지에서야 분열의 요소들을 지울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묶어 주신 한 골육이고 또 하느님께서 기름부으신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이, 다윗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이고 그분 영이 머무르는 지도자임을 받아들이니 비로소 통일 왕국의 기틀이 마련됩니다.

반면 복음에서는 분열의 골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 활동이 질병과 마귀의 억압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해주신 일이었음에도 율법 학자들은 그 의미를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율법에 충실한 자기들을 '선'으로 규정하다 보니, 자기들이 못한 일, 아니 관심조차 없던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그 반대인 '악'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발상입니다.

자기들이 공고히 해놓은 제도와 관습을 수호하려, 설사 그것이 하느님의 영일지라도 다른 것은 철저히 거부하는 행태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선한 기적들도 과거에 없던 것이라면 그들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악'일 뿐입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해방된 이들, 질병에서 치유된 이들의 기쁨과 찬미보다 예수님께 쏠릴 감사와 존경이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3,28).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인간이 어떤 일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힘에 대해 설령 무지와 착각으로 오해하고 오류를 범한다 해도 인간의 약함에 기인한 그 죄와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

하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이 이루시는 일임을 감지하면서도 제 이념과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모독하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례적으로 엄중히 경고하며 선고를 내리고 계십니다. 아무리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다 한들 이를 혐오하고 거부하고 피해버리는 이에게까지 가 닿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마다 하느님의 뜻이냐 사람의 뜻이냐 잣대를 들이대는 지나친 영성화도 피해야 하지만,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 짓는 굵직한 사건들에서마저 하느님을 배제하는 무심함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빙자해 약하고 힘 없는 이들을 길들이고 조종하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과정도 선하고 결과도 선합니다. 끝이 좋으니 다 좋다는 말은 신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자기 욕망에 기인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두려움과 불편으로 몰아넣지 않았고, 오로지 상대의 선익을 위한 대가 없는 베풂이었습니다. 곧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지요.

성령과 함께하는 영혼, 그리고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영혼이 될 수 있기를 청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