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오상선 신부님 ~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 당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렇게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먼저 우리가 회심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체험하였듯이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크게 마음을 고쳐먹는 체험을 통해 참 기쁨을 체험하여야,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작은 회심 체험이 있답니다.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의 체험,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의 체험, 술이나 담배, 도박을 끊게 되었을 때의 체험, 이 길 저 길을 망설이다가 기도로 길을 찾게 된 체험,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

이런 크고작은 체험들을 통해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운명이요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 사건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 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구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만들어 낸 기적이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수련시작을 하게 되는 우리 바오로 벗에게도 오늘이 또다른 하느님 체험, 또다른 회심 체험의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저나 바오로 벗이나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지니고 있기에 오늘이 더 특별한 축일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회심 체험을 세 번이나(사도 9,1-19; 22,3-22; 26,12-18)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가져오게 만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하느님 체험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실로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근처에서 큰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고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었으며, 다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사도 22,6-9) 영적인 것을 보려면 육신의 눈이 멀어야 되고, 비로소 육신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성령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체험은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가 열림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제서야 그동안 내가 보고듣고 경험한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크게 회심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를 무섭고 싫은 사람으로만 여기다가 회심 후 그를 영혼과 육신에 달콤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지는 참 그리스도인이라 보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 하느님 체험은 출발점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되는데는 하느님의 기묘한 개입 외에도, 하나니아스(사도 22,12)라는 신앙의 선배와 바르나바(사도 9,27)라는 훌륭한 도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협력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당신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니아스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말하자 바오로는 그 순간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됩니다.(사도 22, 12-13)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사도 11,24) 바오로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제자들마저도 두려워하며 그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할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그의 회개여정을 설명해주며 변호해줌으로써 한 형제로 받아들여지게 해줍니다. (사도 9,27~) 그는 또한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지원해 준 최고의 협력자요 참사도였습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사도 바오로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우리가 되어 있음에도 이같이 하느님의 섭리와 그 섭리의 도구로 협력자가 된 신앙의 선배요 도반들이 있었을 겁니다. 오늘 나의 하나니아스는 누군지, 또 나의 바르나바는 누군지 한번 돌이켜보고, 그에게 마음으로 깊이 감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나도 그 누군가의 하나니아스요 바르나바가 되어 주기를 다짐하는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제 바오로 벗은 세속의 옷을 벗고 수도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제 육의 자녀가 아니라 영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율법의 자녀가 아니라 복음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입게 됩니다.(갈라 3,27; 로마 13,14) 수도복이 수도자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수도복은 이제 그리스도를 옷입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종임을 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복은 옛부터 십자가 형상의 苦服이라 불리었습니다. 이제 수련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기를 시작합니다. 수련기는 그래서 '시련기'라 불립니다. 다른 벗들은 오늘부터 바오로 벗에게 시련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련들을 다 겪고 이겨내어야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의 서원을 발할 수 있게 됩니다. 승리를 위해 고된 훈련을 사서하는 운동선수들을 생각하십시오. 게으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투쟁하십시오.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했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회심의 여정은 열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택하신 이유도 그의 열정 때문이었을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축구 대표선수를 뽑는데 열정이 없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 나라의 대표선수를 열정과 투신이 없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우리 모두 새롭게 시작합시다. 새로운 열정으로 회심의 삶을 삽시다.

사도 바오로, 저희의 회심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