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르 6,7).
악에 대한 권한은 본래 하느님의 것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셔서 그 권한을 행사하시면서 이제 제자들에게도 그 권한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미처 만나러 올 수 없는 각 지방 곳곳의 사람들도 파견된 제자들을 통해 그 권한의 수혜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 임금이 왕위계승자인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 지켜라. 그러면 네가 ... 성공할 것이다"(1열왕 2,3).
다윗이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국제 정세 읽는 법이나 외교술, 전쟁기술, 통치 노하우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지켜나가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며 그들을 다스리는 왕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새 임금에게 뼛속 깊이 새겨 주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화답송).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처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반복하여 노래하고 있나 봅니다. 사실 아무리 건강과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보인다 한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쌓고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 만물과 나라와 권세가 주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복음 환호송).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 공간적 국가라기보다 선하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지요.
"빵, 여행 보따리, 돈, 옷"(마르 6,8-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선교 여행의 준비물 목록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나열하시는 하나하나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모두가 가리키는 본질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 맡기고 훌훌 자유롭게 가라"는 것이겠지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하느님 주권을 인정하고 체험하는 것이 순서일 겁니다. 그래야 앞으로 제자들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될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느님 뜻대로 살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제자들에 앞서 예수님께서 이를 몸소 삶의 표양으로 보여 주고 계셨지요. 제자들에게는 실전에 임하기 전에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보고 배운 가난, 의탁, 비움, 버림, 자유 등을 한번 더 육성으로 확인하는 정도가 되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복음서 초반의 선교 여행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자들은 아직 미숙하고 준비가 미흡한 상태일 터인데,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실전에서 진짜로 하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 아니라 스승이 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고 있기에 가능한 기적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말과 손끝과 행동을 통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심이 드러나는 중입니다.
비단 오늘 기념하는 일본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자, 증거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다가 목숨을 바친 분들이지요.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영성체송).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보상은 그분의 잔치상에 참여하는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이 기뻐 춤을 추네"(입당송).
또 그분이 베푸신 향연에서 그분의 행복한 파트너로 함께 호흡하고 발맞춰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런 가슴 뛰는 보상은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죽은 뒤에나 맛볼 담보물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과 상태에서 나를 비우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온전히 내어맡기고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느님 주권 아래 존재하는 것입니다. 잔칫상에서 그분께 기대어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분과 춤을 추는 사랑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비운 자리에 성큼 들어와 건설되는 영적 실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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