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하느님 사람을 만납니다. 다윗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는 소명을 이어갔습니다. 평범한 백성에서 임금에게까지 정의와 진실을 촉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지요.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받아들였지만 이미 견고한 기득권을 획득한 종교 지도자들과, 스스로 보편 윤리 위에 있다고 여기는 권력자들은 그를 불편해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당대 최고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헤로데, 헤로디아였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마르 6,14).
전혀 다른 가치관을 사는 사람에게까지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임에도, 권력과 욕정에 눈이 먼 헤로데에게조차 세례자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헤로데의 진심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굳이 핏대를 세워가며 두둔하거나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사람의 진실은, 그 진리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도전해 올 때 드러납니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 6,26).
결국 경솔하고 허세 가득한 맹세와 체면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가졌던 헤로데 나름의 호의에 대해 마르코 복음사가가 여러 차례 언급을 해준다 한들 결과는 이렇습니다. 세기의 의인 세례자 요한은 한 소녀의 춤값, 권력자의 체면치레, 불륜의 입막음용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지요.
제1독서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대표적 성군 다윗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염소 새끼들과 놀듯 사자들과 놀고 양들 가운데 어린양과 놀듯 곰과 놀았다"(집회 47,3).
이 말씀은 우리를 이사야서의 한 대목(이사 11,1-9)으로 초대합니다. 메시아의 도래, 경쾌하고 따사로운 평화의 왕국을 노래한 부분이지요. 기름부음받은이 다윗은 이스라엘을 이방인 억압에서 구원하여 평화를 이루고 왕국의 기틀을 세운 메시아의 전형입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집회 47,8).
집회서 저자는 전쟁에서 보여준 다윗의 용맹함 못지않게 그의 기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다윗은 하느님과 관계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거룩하다고 표현하지요. 게다가 그는 스스로도 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면서, 온 백성이 공식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도록 성전에서 울릴 찬미와 찬양의 노래, 시, 제도까지 마련하였지요.
"다윗은 ...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8).
이 말씀 안에 다윗의 정체성과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무수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 안에 성군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부족한 이의 이 "사랑"을 귀하고 애틋이 보아 주신 하느님 덕분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의롭고 거룩한 길을 외치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억울하고 불운한 죽음이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그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는 하느님께 올리는 오롯한 찬미였지요. 의무만으로 해치울 수 없는 이 소명의 원동력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과정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 그 사랑을 향해 가고 있다면, "실패"란 우리와 관계 없는 이방 언어입니다. 그분께 올리는 우리의 찬미가 이 세상에서 설령 죽음으로 표현된다 하여도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어떻게 주님을 찬미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어떤 경로로 표현되어 올려지고 있나요? 적어도 헤로데가 택한 욕망과 허세와 체면치레의 길이 아니라면 피흘리는 순교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어도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현재 벗님의 삶이 가난하고 부끄럽고 내세울 것 없는 그런 삶이어도 좋습니다. 온 존재를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찬미 드리는 오늘 되시기 기도합니다. 그러고 있다면 벗님도 이미 의롭고 거룩한 사랑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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