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님봉헌축일이고 수도자들의 날입니다. 교회의 생명과 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수도성소를 많이 보내주시도록 청하는 날입니다. 또 수도자들은 오늘 자신의 봉헌서약을 갱신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를 포함하여 내가 아는 수사님, 수녀님들에게 축하를 드리고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봉헌은 "받들어 바친다."는 뜻인데,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바쳐야 참으로 봉헌이겠지요. 수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친 사람들이지요.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연인을 포기하고, 재산과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좋은 직장과 명예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정결과 가난과 순명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합니다.
이렇게 봉헌은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의 포기를 전제로 하지요. 그게 싫어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큰 사랑의 완덕으로 향하기 위한 선택이지요. 봉헌은 내 것의 일부를 떼어 바치는 게 아닙니다. 원래 그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모든 좋은 것을 그분의 것임을 알기에 내 것이라 고집 않고 돌려드리는 행위가 참봉헌이겠지요!
오늘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칩니다."(루카 2,22)
예수님도 어려서 하느님께 바쳐진 몸이셨군요. 사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하셨더랬지요. 백일 잔치 때도, 돌 잔치 때도, 세례 때도... 우린 모두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다만 기억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살아가면서 "아! 정말 내가 하느님께 바쳐진 몸이구나!" 깨달아 알게 되면, 그제야 제대로 나를 봉헌하고 싶어지지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맘대로 쓰소서."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던 날 특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메온이라는 한 노인이 성전에 들어오더니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서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말하더라더군요.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29-30)
이제 시메온처럼,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될까요? 할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고 삶에 더이상 미련이 없으니 말입니다. 요즈음 '백세인생'이 대세라지만 더 일찍이어도 이렇게 한줌 미련없이 기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요? 시메온은 주님의 구원을 자기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네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시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된다면 평화롭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복음은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루카 2,27)고 전합니다. 누군가 성전을 향해 나아간다든가, 또 누군가 삶의 방향성을 성전 쪽으로 튼다면, 그건 결코 제 혼자만의 자의적 힘으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긴 세월 의롭고 독실하게 구세주를 기다리며 성령과 함께 살아온 시메온도 결정적 순간에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구원을 본 것"(2,30)처럼 말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이 만남에 동참합니다. 그녀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2,37)고 합니다. 수도자들의 원초적인 열망은 바로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라고 봅니다. 성소를 받고 이 삶을 시작했을 때는 오롯하게 한평생 주님만을 섬기는 삶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고, 성전이신 분께서 오라고 친히 손짓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인도 아래 오롯하게 주님만을 섬기며 살고싶다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식어가고 마침내 사도직에 지치고 관계에 병이 들면서 성전으로의 발걸음은 점점 뜸해집니다. 오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자신의 수도서약을 갱신하는 수도자들은 바로 이 원초적 열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향한 방향성은 일방이 아닙니다. 우리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성전을(성전이신 분을) 향해 가고, 그분도 우리를 향해 성전으로 오십니다. 이 만남은 서로를 향한 지고한 사랑의 끌림이 만들어 내는 해후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이신 분이시면서도 자신을 성전에서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는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고 말합니다. "홀연히"라는 부사의 사전적 의미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작스레'입니다. 성전이신 분이 자기 성전에 오실 때 예정된 시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홀연히", 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말씀인지요. 마치 성령처럼 바람같고 숨결같고 공기같습니다.
그러니 유한하고 무지하고 죄인에 불과한 우리가, 우리를 섬기고자, 우리에게 당신을 봉헌하시고자, 친히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을 만나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우리를 봉헌하고 그분과 일치하려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두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의 삶을 열쇠로 삼아야 합니다. 즉, 때를 기다리며 성령에 이끌리도록 자신을 허용하는 삶,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래야 언제일지 모르게 홀연히 오시는 주님을 제 때에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율법에 따라 바쳐지신 아기 예수님의 봉헌과 더불어 두 예언자의 봉헌의 삶이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새로운 봉헌의 날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봉헌을 축하드립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즐겨 바쳤던 기도, <아무것도 너를>을 오늘의 축가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 만으로도 만족하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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