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6주일 / 오상선 신부님 ~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에 대해 논합니다. 예수님도 참행복을 선언하셨다고 루카와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행복선언은 산에서 이루어져 '산상설교'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루카복음의 행복선언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서"(루카 6,17) 말씀하셨다 해서 '평지설교'라 불리기도 합니다.

"산"이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상징한다면, "평지"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 죄인들이 사는 현장, 기쁨과 눈물과 다툼과 애증이 엉킨 실질적 공간을 상징합니다. 비슷한 가르침 일화에 서로 다른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데는 두 복음사가의 목적과 의도가 나름대로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현세에서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 내쫓김, 모욕, 중상에 시달리니 얼마나 고단하고 서러운 삶인지 체험이나 짐작을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복음 내용에 실마리를 던지듯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위로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1코린 15,19)이라고.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내세만을 기다려야 할까요? 현세와 내세가 영 다른 양상일까요? 현세에서 힘들게 살면 내세에서 복 받고, 반대로 현세에서 누리고 살면 내세에서 불행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이런 이분법적 결과론이 아닐 겁니다

가난해도, 울고 있어도, 미움받고 쫓겨나고 모욕과 중상에 시달려도, 그런 힘에게 자신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배부르고 웃고 모두에게 칭송받아도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가난이 행복을 부르는 신비에 대해 예레미야 예언자는 제1독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여레 17,7)

그렇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제 힘과 사람에 기대기보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신뢰를 두는 것. 이 온전한 의탁이 부족하고 약하고 죄인인 가난한 이를 행복에로 이끕니다. 그러니 행복의 조건에서 가난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삶을 사는 데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과 권력 명예가 오히려 방해거리도 될 수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고 내 말 한 마디면 움직이는 이들이 있고 내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내 힘만 믿고 산다면 내 삶에서 과연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먼저 걸으셨고,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글라라, 엘리사벳, 그밖의 많은 성인들이 따랐고, 지금도 무수한 이들을 매혹시키는 길입니다. 가난의 길, 주님을 소유하는 길, 행복의 길...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행복과 불행은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가에 판가름난다고 성경은 역설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느냐 아니면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육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영에 의지하느냐. 능력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섭리에 의지하느냐.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여러분은 누구에게 의지하고 무엇에게 의지하시는지요? 우리는 화답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 1,1) 시편의 시작이 "행복하여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 놀랍지 않으세요.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루카 6,24)

여러분은 재산이 많습니까?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찢어지게 가난합니까? 그래서 불행합니까? 대다수의 우리들은 대단한 부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을 겁니다. 먹고살만은 한데 조금 더 넉넉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은 크게 수긍이 안 가지만, 지금 부유한 사람은 받을 위로를 충분히 받았으니 더 큰 위로는 필요없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토를 달고싶지 않을 정도로 수긍이 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조금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지금 더 넉넉하고 나중엔 더 못받아도 상관없을까요? 퇴직금을 일시불로 지금 다 받는 것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조금씩 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받기를 원하시나요?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위해서 지금 조금 부족하다시피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언론매체를 통해 억만장자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비참하게 되는 꼴을 한번씩 접할 때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이 딱 맞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그런 부자들이 결코 불쌍하지 않고 통쾌하기까지 하니 그런 부자로 살기보단 조금 부족함을 느끼는 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복되구나 생각듭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니 내가 좀 부자다 싶으면 얼른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항상 조금 아쉽다 할 정도로 만든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얻는 비법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 6,20) 아멘.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