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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표징'(sign)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구마, 빵을 많게 하신 기적들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넘치게 보여주셨건만 그들에겐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예수님께서 많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완고하게 닫힌 그들 마음은 과연 무엇으로 열릴까요?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다가 빛을 만난 이들과 함께 경축하고 기뻐하기에도 모자라건만, 자기들이 원하는 표징이 아닌 다음에야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버티니 도무지 그들을 수긍하게 만들 재간이 없습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불신을 선택한 이들에게 선고가 내려집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죽은 이가 되살아난다 해도 꿈쩍도 안할 겁니다. 어떠한 표징도 그들에게는 표징이 아닐 것이니까요.

"그들을 버려두신 채"(마르 8,13).

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예수님께서 좀 낯선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을 뒤에 버려두고 떠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과연 어떤 표징을 원한 걸까요? 아니, 우리는 삶에서 어떤 표징을 바랄까요? 그들처럼 우리도 현세적 견지에서 복잡한 일의 해결이나 풍요한 재물, 안위나 평안, 안정과 명예 등의 표징으로 주님과 내 믿음을 거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입맛에 맞는 표징만을 주님께 요구한다면 결국 주님의 부재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겁니다. 햇살만 가득 내리쬐는 꽃길에서는 주님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오히려, 진짜 표징은 "고통"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표징과 일치하는 유일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복음 환호송).

그래서 복음 환호송의 이 말씀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들립니다.

제1독서는 시련과 구원의 상관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세상은 고통과 시련을 악으로 치부해 회피하거나 외면하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값진 도구로 받아들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희망이니까요.

"고통을 겪어도 저는 마땅하옵니다"(화답송).

시편 저자의 이 표현은 "나는 그래도 싸다"는 식의 자포자기나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또 고통에 대해서 "왜 하필 내게?"라는 부질없는 물음도 아니지요. 그저 힘을 빼고 "그게 무엇이어도 당신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는 수용적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겸손은 고통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주님께 이르는 통로라고 자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지울 수 없는 표징을 매일 마주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고통이 우리를 비켜가지 않고 자꾸만 찔러대고 건드린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 표징을 직면하는 제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실상 고통과 시련을 통해 우리 믿음에 인내가 싹트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는 다리가 엮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구미에 맞는 곳에서 표징 찾기를 멈추고 진짜 표징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이 반드시 계십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십자가를 깊이 바라보며 주님을 만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