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 독서들을 읽노라면 신명기의 중요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4-6).
오늘 복음 대목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려오면서 시작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제 솔로몬이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질책의 결과가 펼쳐집니다. 성경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시했지요.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1열왕 11,10).
결국 다윗이 이룬 통일 왕국은 불과 한 세대를 건너 솔로몬의 아들 대에서 갈라지고 맙니다. 아히야 예언자는 예로보암을 만나자, 솔로몬 아들 르하브암에게 대적하는 북쪽 열 지파의 임금으로 세웁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분열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은 죄로 인해 시작됩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화답송).
이후에도 주님은 당신께 귀를 막고 돌아선 백성에게 줄곧 호소하시지만 이스라엘은 긴 세월 동안 점점 더 완고해지고 무디어져 갑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인 예언자들을 박해하며 귀를 닫고 살던 그들은 유배와 패망의 치욕을 겪으며 어느덧 예언자마저 부재하는 암흑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민족의 압제 아래 이제 구원은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일 뿐입니다.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마르 7,33).
세상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현실을 마주하신 순간, 그분은 매우 구체적으로 움직이십니다. 마치 태초에, 다른 피조물과는 별개로 공들여 인간을 창조하셨던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듯합니다. 지금은 재창조의 시간, 귀먹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이스라엘이 치유받고 위로받고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하늘은 성부 하느님, 한숨은 성령의 현존입니다. 지금 성 삼위께서 함께 온 힘을 모아 이스라엘을 회복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열려라!"
이 말씀은 귀먹은 이가 처음으로 들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귀라는 감각 기관으로 듣지 못하는 대신 온 존재로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순종합니다. 이 순종이 예수님의 힘과 맞닿아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 분부하셨다. 그러나 ...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이 환희와 영광의 순간,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다시 죄의 쳇바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침묵을 명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리고 따르기보다 소문내기에 열중합니다. 고통스런 역사 안에서 귀먹고 말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기적은 값싸고 흥미진진한 가십거리 정도로 회자되고, 여전히 백성은 "듣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는 못 들어서 따르지 못했던 과거에 한술 더 떠서, 귀가 열렸으나 듣지 않는, 그래서 더 하느님을 안타깝게 해드릴 역사로 진입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실 말씀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매일 미사마다 교회가 준비한 말씀의 잔치가 벌어지고, 손 닿는 곳에 성경이 있습니다. 교구와 수도회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마련해 우리를 부르고, 이런 묵상글도 수없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말씀과 관련된 서적과 강의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이 모든 자원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막히고 닫히고 망가진 부분을 어루만지시며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경전으로 소유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겉으로는 말씀을 따라다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듣지 않는데"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과의 관계에서는, 그저 조금 지치고 느슨해지고 게을러지는 매너리즘이란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믿어서 따르는 길, 아니면 듣지 않고 제 식대로 가는 길, 이 둘 뿐입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그러니 우리는 늘 이렇게 간청해야 합니다. 절벽이던 우리 귀가 열릴 때까지 외치고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애타는 사랑 고백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의를 떼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의 근원과 이유를 들려 주고 또 우리가 가야할 방향과 목적을 제시하십니다. 말씀은 한처음에 계신 하느님이시고(요한 1,1 참조) 말씀이신 주님께서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중 제 6주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2.02.13 |
---|---|
~ 연중 제 5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2.02.12 |
~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2.02.10 |
~ 연중 제 5주간 수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2.02.09 |
~ 연중 제 5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