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예배를 만납니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마르 8,1).
이 이야기는 어제와 같이 이방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군중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얻으며 "사흘 동안이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광야에 머물렀지요.
사천 명가량이나 되는 무리가 모인 광야를 떠올려 봅니다. 인가도 시장도 없는 곳에서 사흘이나 머물렀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지탱할 자원이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르 8,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열어보이십니다. 마음에 흐르는 연민의 사랑에 제자들도 동참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 8,4) 하고 반문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은 냉정히 들리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 8,5)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마르 8,7).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이 소유한 바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자의건 타의건 먼저 자기 것을 내놓은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마르 8,8).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리신 "감사"(마르 8,6)와 미소한 양식에 베푸신 "축복"(마르 8,7), 그리고 제자들을 통한 "나눔"이 큰 기적을 이룹니다. 보잘것없는 소량의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연민과 기도를 통해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잔치상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굶주린 큰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서 나온 줄도 모르는 양식을 받아들고 서로 나누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받는 이들이나 나누는 이들 모두 영혼과 육신의 허기를 채우며 흥겨워하고 흡족해합니다. 이렇게 이방인 지역 광야에서 펼쳐진 기적의 현장이 흡사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는 우리의 미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예로보암의 근심을 읽습니다. 왕위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그는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에게서 갈라진 북쪽 지파들을 다스리면서 백성의 마음이 다시 예루살렘을 향할까 걱정하지요.
"여러분의 하느님이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 12,28).
그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베텔과 단에 두고 여기서 예배하라고 백성에게 이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통 고대 종교에서 신상을 만들 때에는 주조된 짐승 위에 놓습니다. 사실 이 송아지도 그 자체가 신이라기보다 그 위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떠받치는 밑받침 정도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단지 예루살렘과 구분된 장소를 제공하려는 예로보암의 의도는, 그곳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니라 밑받침인 송아지 상을 신으로 여겨 경배하는 바람에 죄로 굳어지고 맙니다.
게다가 그는 "레위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1열왕 12,31)합니다. 얼핏 보면 기회의 균등화나 공정화인 듯 보이나, 어쩌면 유다 자손이 아니면서 임금이 된 그가 레위 자손의 사제직 세습이라는 정통성 역시도 부인하고 파괴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하시며, 빵을 축복해 사람들을 배불리십니다. 사제직의 원형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그분에게서 드러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왕직과 사제직, 예언직이 하나의 본류로 합쳐지고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지역 광야에서 이 축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신분이 아니라, 지파나 가문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요한 4,24) 하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정한 사제 지파와 가문의 규정을 뛰어넘는 사제이십니다. 그분 사제직의 완전성은 당신 자신을 친히 제물로 바치는 희생 제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많건 적건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가진 바를 내어놓게 하심으로써 이 제사의 완전성으로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자기 소유가 내어놓는 과정을 통해 엄청난 기적이 되는 것을 확인한 제자들은 아마도 결코 이 맛을 잊지 못하고 결국 그 길을 갈 겁니다.
그렇습니다! 직무 사제직이건 보편 사제직이건 자신을 내어놓고 바치는 희생 제사와 하느님께 올리는 감사 기도,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축복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우리는 감사와 축복과 나눔으로써 세상을 위한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주님께 진실한 예배를 바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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