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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6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어제 예수님의 수난 예고 내용에 이어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해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예수님께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자신과 십자가, 둘 중 하나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십자가를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더 편하고 강하고 즐거운 것을 좇기에 불편하고 약하고 고통스러운 것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다. 자아로 가득찬 이에게는 십자가의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아름다운 이상과 훌륭한 생각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행동과 직접 뒤따르는 발걸음이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생각으로 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급기야 목숨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똑같이 "목숨"으로 표현했지만, 실은 육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극과 극의 의미를 각각 담고 있지요. 육의 목숨을 잃지만 영의 목숨을 얻는 길은 그 투신이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 때문이어야 합니다. 자기 명예나 재물, 권력, 쾌락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체가 이미 죽은 목숨을 산 셈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실천"의 상관 관계를 설명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덕입니다. 사실 믿음의 정도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이 감추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으니까요. 믿음이 깊은 이는 제 자랑을 않으니 드러나지 않고, 믿음이 없는 이는 믿음이 귀한 줄도 모르니 무관심할 따름입니다.

믿음 또한 십자가처럼 생각으로만 간직하는 이상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덕이지요. 그 상관 관계는 예수님을 따르는 원리와 같습니다.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고 그분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자아를 비우는 고통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뒤따르는 결단이 없다면 그건 그냥 머리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역시, 주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인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승화될 때 온전한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각자 자기 실존에 맞게 제 십자가를 어떻게든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매일 이처럼 말씀을 뒤적이고 묵상글을 읽고 머물러 기도하는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말씀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고, 십자가의 어둠은 말씀의 빛을 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은 그 희망과 해답을 구하고자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저마다 십자가는 다르지만 말씀의 빛이 우리를 인도하고, 말씀의 감촉이 우리를 위로하며, 말씀의 힘이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키니까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체적 현실은 말씀과 함께여서 가능한 길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꿋꿋이 충실히 묵묵히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걷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