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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8주간 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의 한다한 사람들이 영생의 불로초를 구하고자 하지요.

영생을 얻고자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용하다는 사람에게 재산을 다 갖다 바치기도 합니다. 명약이란 명약을 다 찾아 헤매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면 인기만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마르 10,17)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해 여쭙습니다. 그의 열망과 겸손이 느껴집니다.

"선하신 스승님!"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는 그의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영원한 생명'은 그도 잘 알다시피 '받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계명 준수처럼 자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걸 주실 수 있는 분이 선하다면 청하기도 훨씬 쉬울 것이니까요. 하느님 한분만이 선하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고 하느님이 그것을 주실 거라는 뜻이겠지요.

그는 두루두루 갖춘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느님 경외나 종교적 실천은 물론 세속적 재물까지 어느 한 부분 모자람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부족한 부분, 곧 그의 결핍을 찾아내십니다. 그의 부족함은 바로 "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에 빈 곳이 곧 하느님의 자리인데 인간적 능력과 의지, 재물로 꽉꽉 들어차서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움, 없음"이 없는 존재에게는 하느님께 내드릴 자리가 없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그를 겁주거나 시험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를 사랑스럽게",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가 바라마지않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가장 확실한 팁을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 그가 애써 노력해 성공적으로 이룩하고 쌓아온 것을 '다 필요없다.'고 부정하고 폄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태까지 계명도 잘 지키고 일도 열심히 하며 충실히 채워왔으니, 이제는 다른 차원의 채움을 시작하도록 초대하시는 겁니다. 비우고 버리고 나누는 것이 흔히 생각하듯 상실이나 실패, 낭비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이고 영원한 생명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하게도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마르 10,22)갑니다. 처음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을 때의 열정과 겸손의 불씨는 사그라지고, 절망과 슬픔으로 처음보다 더 못한 상태가 되어 발길을 돌리는 그의 축 쳐진 어깨가 보이는 듯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성향상 제도나 조직에 잘 적응하고 주어진 규범에 이의 없이 순종하며 세상 질서에 별 의문 없이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느 선까지 무탈하게 성공 가능한, 말하자면 꽤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룰 수 있는 최고치가 바로 복음 속 "어떤 사람"이 도달한 위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제법 누리는 중이고 특별히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이제는 초월을 꿈꾸어 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가 그동안 이룬 것을 바탕으로 손을 뻗어봄직한 보물입니다. 쟁취하고픈 또 다른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그의 존재 안에 빈 자리가 나야 하늘 나라의 질서가 들어갈 공간이 생깁니다. 비워야 하는 그것이 그에게는 재물이었지만, 누구에게는 명예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관계나 인맥이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는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간의 그의 노고를 비웃거나 억지로 내놓게 하려는 강요가 아니라, 그게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기에 그렇게 안내하셨을 뿐입니다.

복음 속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의 체념에 공감이 가고 마음도 불편해진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는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어 봅시다. 혹 그 사람과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덕과 재물이 사실상 제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그리 될 수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동안 이를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께서 다음 스텝도 가능하게 해 주실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아직 버리고 비우고 나눌 준비가 되지 않아 뒤돌아서거나 미적거리더라도, 그럴 자유까지 허락하시는 하느님께서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의 것이 온전히 비워지고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채워지는 구원의 때가 올해에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이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집회 17,24)이시니까요.

그런데 그 "때"를 너무 길게 잡고 방심하지는 말아야겠지요.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는 법"(집회 17,28)이고, 통렬한 후회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 "때" 역시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대견해하시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네요. "너에게 한 가지가 딱 부족하구나. 그것만 있으면 너는 깨달음을 얻어 하늘 나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게 도대체 뭘까 물어봅니다. 벗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는지요?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버려보라고 하시네요. 비워보라고 하시네요. 나눠보라고 하시네요. 놓아보라고 하시네요. 

맞아요!!! 채우고 쌓고 지키기에만 최선을 다했지만 자유가 없네요. 평화가 없네요. 참 기쁨이 없네요. 하늘 나라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채우기와 쌓기와 지키기만으로는 진정한 하느님 나라를 만끽할 수가 없습니다. 비우기와 버리기, 놓기와 나누기가 필요합니다. 쉽지 않지요.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벗님은 무엇을 내려놓으실래요? 무엇을 버리실래요? 무엇을 나누실래요? 어떤 길을 택하시겠어요? 현세의 삶으로 만족한다면 채움의 길로 가고 영생을 희구한다면 비움의 길을 택하라고 하시네요. 현명한 선택으로 영생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