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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5주간 수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대목에 등장하는 대상은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요한 8,31)입니다. 믿지 않는 바리사이들이나 최고의회 의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들에게 제자가 되는 길을, 그것도 "참으로"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네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육화하신 말씀이시기에, 말씀에 머무르는 이는 그분에게 깊이깊이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근본 정신과 뜻하시는 바와 말씀께서 나아가시는 방향을 감지하며 어렴풋이나마 진리를 인식하고 물들어 갑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게 진리를 접촉하고 맛보며 걸어가는 이는, 살고 사랑하고 일할 때 어느 조항, 어느 규정, 무슨 판례를 일일이 들춰가며 제 생각과 행동을 규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되신 분, 진리의 주인이시며 사랑이신 분의 무한한 품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듯 살아도 됩니다. 그것이 자유(自由)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사랑을 누릴 자유! 그것 말고 피조물에게 더한 행복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나마 당신을 믿던 유다인들마저 발끈하네요. 제자가 되라고 했더니 오히려 "자유"라는 말씀이 몹시 거슬린 듯합니다. 자신들이 따라가는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부끄럼 없이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요한 8,41)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 불쏘시개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놀랍게도 그들 입에서 엄청난 고백이 흘러나오네요. 그들이 자기 선조, 조상이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하는 수준을 넘어, 하느님을 직접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실 때의 관계성과 상호 이해, 친밀함에는 못 미치고, 그동안 예수님께서 설파하셨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르침과 별반 다른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하느님 백성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라고 임기응변이든, 진심이든 스스로 선포한 겁입니다. 참 놀랍지요?

독서에서는 자기를 신(神)으로 섬겨 경배하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에 던져진 세 유다 청년이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다니 3,95)라고요. 놀라운 기적 앞에서 외친 이방인의 이 고백이 비록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앎과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입을 빌려 찬송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힘이고, 때가 차면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복음에서 비록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스스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 시인하는 유다인들의 고백에서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등장한 이 "사생아"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미스테리한 출생에 대한 비아냥일 수도 있고, 과거 우상숭배로 불륜을 저지르면서 혼인 관계로 표상되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번번이 깨뜨린 조상들에게서 근본도 없이 태어난 후손이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백성 한가운데 오신, 자기들 눈 앞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자기들의 하느님께 충실한 것이라고 믿고자 오히려 더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지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이처럼 믿지 않을 자유, 거부할 권리도 인정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그래도 믿어드렸던' 일부 유다인들은 오늘부로 마음을 돌릴 것 같습니다. 감히 자신들을 아브라함이나 하느님의 자손이 아닌, 죄의 종으로 규정하다니... 근본도 모르는 떠돌이 망상가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다니...

이미 빛과 어둠이, 생명과 죽음이, 선과 악이 제 자리를 잡아 갈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자유로 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자기들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의 힘인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면서 그동안 지켜온 율법과 신념을 고수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자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주는 자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단서를 독서에서 만났습니다. 불가마에 던져지기 직전 세 유다 청년이 임금의 마지만 회유를 거부하면서 한 말, "그분께서 ... 저희를 구해내실 것입니다. ...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다니 3,17-18)라는 부분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제 안의 모든 바람에 대해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관대한 의탁과 허용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으니 결과가 어떻든, 자기가 바라던 것이든 아니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가장 좋은 걸 더 잘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해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나도 그게 좋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청하되 결과에 집착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자유란, '내 맘대로 할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맘대로 하시도록 나를 활짝 펼쳐놓고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일 겁니다. 이 자유는 말씀에 머물러 진리와 접촉하는 이에게 가능합니다. 이런 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께서 가슴이 터지도록 기쁘고 행복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벗님 여러분은 자유로우십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굴레에 얽매여 있습니까? 언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요한 8,32) 테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를 찾아 누릴 수 있을까요?
수많은 현자(賢者)들이 이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며 웃고 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너무도 쉬운 곳에,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멀리서 진리를 찾는 헛수고를 하지 말고, 내가 곧 진리이니 나에게서 진리를 찾고 깨달음을 얻으라 하십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하면 할수록 진리가 아주 가까운데 있음을 더욱 느낍니다. 그 말씀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언젠가 이 말씀마저도 필요없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하고 고백할 날이 오기를 염원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벗님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