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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5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의 후일담입니다. 그 일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기적, 표징보다 적대 세력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럴 수밖에요. 삶과 죽음은 인간 능력 밖의 문제, 즉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운운하며 자기들의 불안을 민족적 운명으로 확대하고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공격욕구를 합리화합니다.

그때 그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가야파의 예언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요한 11,51)이라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에는 그 자신도 의도치 못한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저울 한 쪽 접시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 나아가 온 인류를 올려놓고, 다른 한 쪽 접시에는 예수님을 올려 놓은 채 평형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미치광이 몽상가 죄인일 뿐이라고 규정해 놓고서도 대사제직에 부여된 영의 뜻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했을 겁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이 "백성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단순히 로마인들의 비위를 맟추기 위한 희생양 정도가 아니라, 죄악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한" 고귀한 죽음이 될 것임을, 자기도 모르면서 고백한 셈입니다.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바빌론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 주시는 새 희망이 울려퍼집니다. "한 임금, 유일한 목자."(에제 37,22.24) 주님께서 세워주실 평화의 임금, 그분 종 다윗을 이을 새로운 통치자는 가야파 입을 통해 발설된 "한 사람",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7,23.27 참조)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계약의 말씀이 다시 갱신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첫째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시리라."(에제 37,23)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시고 백성 가운데의 성전 안에 현존하시리라는 이 약속은, 마침 오늘 복음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관습에 잘 드러나 있지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요한 11,55-56)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새 계약은 이렇듯 유다인들 종교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온 백성, 온 인류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시간과 공간, 육체와 신분, 이스라엘에게만 부여된 듯 자부했던 율법과 선민사상을 초월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떠올려 봅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23) 유다인들이 사유화했던 정결례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한 하느님 현존의 계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제사를 통해 그분 이름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나 확장되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육신의 소멸이 오히려 영의 자유로운 활동과 믿는 이들의 헌신으로 부활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파스카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 잠시 숨을 돌리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유혹과 어둠의 시간을 예수님 수난과 발맞추어 성실히 완주할 수 있기를 서로 격려하면서 용기 북돋워 주면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벗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