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에서 발도 씻겨지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그분 몸과 피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나서 곧바로 우리는 예수님을 빼앗겼지요. 이제 예수님은 동족의 모진 신문과 조롱, 이방인의 사형선고를 겪고 몸소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요한이 전하는 긴 수난복음에서 우리는 이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성을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위험을 감지한 베드로의 폭력적인 대응을 말리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께는 당장 겪는 인간적 수모보다 이를 허락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중요합니다.
만 하루도 못 되어 속전속결로 집행된 예수님의 사형에 대해 복음사가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요한 19,24)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굵직한 큰일부터 세부적 사항까지 이미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발설된 말씀이시고,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심이 다시 천명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예수님의 길을 한 마디로 "순종"이라고 요약합니다. 굴종이 아닙니다. 순종입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는 아드님의 최고의 고백이고 응답입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이 부각됩니다.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이 온통 고통받는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5)
어린아이가 아플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면 좋겠다."고 토로하지요. 무슨 심정일지 이해가 갈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물리적으로 대신 아플 수 있는 방법은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다만 사랑이, 간절한 기원이,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죽이는 희생이 부분적으로 이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바로 "참여"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눈으로는 직접 관련이 없어보이는 타인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정신적·심리적·영적으로 그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 고통받는 그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여" 정도를 넘어서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십니다. 나를 줄 테니 저들을 놓아주라는, 나를 받고 빚을 탕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스스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이사 52,10)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죄를 대신할 동물의 피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처참한 희생의 지향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위하여"(복음 환호송)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굳이 왜 그러셔야 했을까 이유를 설명하려 복잡하고 난해한 신학적 해석을 뒤지고 다닌다 해도 결론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단순하지만 거대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세상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세상에나! 이렇게 외치다니요... 하느님의 마음을 갈가리 찢는 것으로 모자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사무엘이 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백성이 몰려와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하지요. 언짢아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고 씁쓸히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인은 그 도를 한참 넘어, 이스라엘의 황제는 군사력과 재력, 우상으로 무장한 이방인 임금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선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악에 온전히 동조하면서 이성을 잃은 그들은 자기들이 내뱉은 말의 의미조차 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요? 타인의 아픔에 공감능력을 잃어버리고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들이나 기득권층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접합니다. 교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돈·명예·권력·사교·명품·타이틀을 황제로 삼아 하느님 대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종교인들도 어렵지 않게 많이 목격합니다. 유다인들의 이 외침이 우리 영혼 곳곳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있지는 않은지 성금요일 수난복음 봉독 때 이 부분을 외치면서 스스로 마음의 반응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독서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는 어떤 관계성을 제시하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황망히 당신을 잃은 우리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이번 사순시기 동안 가능한한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얻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십자가 길 만남을 묵상하는 제4처에서 마리아는 제 인생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오셨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특히 고난의 순간에 성모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큰 힘입니다. 여리고 연약한 여성이지만 악을 상징하는 뱀의 머리를 짓밟고 우뚝 선 강인한 모성에 기대어,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두려움과 의혹으로 출렁이는 약한 마음을 다잡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 깨진 그릇처럼 되었나이다."(화답송) 더 깊이 주님의 수난과 스스로의 회개에 몰두했던 사순시기를 마무리하며, 모든 죄의 짐을 벗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랐던 이상과는 달리,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깨진 그릇"! 사순시기를 지내며 깨진 것이 아니라 사실 원래 깨진 그릇이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 깨진 그릇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열심히 철저히 신앙생활을 하려 해도 약함과 숨겨진 죄를 부인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 4,16) 그렇습니다. 벗님,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우선 "자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히브 4,15)하시는 대사제 예수님께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히브 4,16)로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부족한 죄인이지만 자비와 은총이 우리를 새로 나게 해줄 것입니다. 회심한 죄인으로서 우리는 세상과 교회,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필요할 때 겸손과 연민을 얻고 자발적 희생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갈 수 있어야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에 미소하나마 응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잘것없지만 최선인 이 응답에 대해 그분께서는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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