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사도 6,1-7) (요한 6,16-21) |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복음 대목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먹이신 기적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기적에 감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예수님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중입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요한 6,17)
어둠은 시간적으로 저녁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제자들의 내면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승이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는데 제자들은 그분을 기다리지 않고 배에 올라타지요.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취하신 태도를 신뢰하는 이도 있겠지만, 혹시 스승이 정치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못내 아쉽고 착찹한 이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그런 그들이 어둠이 드리운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이 아직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셨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세상 일을 책임지고 살던 장정들이건만 요동치는 검은 호수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그들이 왠지 불안하고 위태롭게 느껴집니다. 그들의 구심점인 예수님의 부재가 마치 그들을 어린애처럼 동요하게 만듭니다. "어둠과 주님의 부재." 이는 하느님과 걷는 영적 삶에서 언제든지 밀고 들어올 수 있는 불청객입니다. 어떻게든 헤쳐 나가보려고 안간힘 쓰며 노를 젓고 배의 중심을 잡아보건만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바람은 더 드세어지고 호수는 뒤집힙니다. 배는 나뭇잎처럼, 종이조각처럼 이리저리 쓸려다닐 뿐 보호막이 되지 못합니다. 물이 차오르지만 퍼낼 힘도 없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자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육신을 지닌 존재가 물 위를 걷는 비상식적인 움직임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려움'까지 엄습합니다.
영적 삶에서 어둠에 휩싸이고 주님이 곁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 또 믿었던 주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이 느껴질 때에는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간 형성된 주님에 대한 인식이 깨져야 새로운 접근 방식을 깨닫고 맞이할 수 있는데, 아직 우리 영의 눈과 마음이 그만큼 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신 예수님의 짧은 말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이 순간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에 안심한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으로 가 닿았다."(요한 6,21)고 합니다. 제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장애, 두려움을 간파하신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제자들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고 자기들 곁에 모시려고 하지요.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
"어느새". 이 단어는 철저히 제자들의 주도권이 배제된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제자들은 몰랐다는 말이니까요. 어둠 속에서 동요하는 영혼에게 주님께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실 때, 믿고 그분을 맞아들이려는 의향만으로도 이미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보려고 안간힘 쓸 때는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뒤로 밀려나 버렸는데, 주님 현존을 갈망하고 팔을 뻗는 것만으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 생겨난 잡음에 대해 솔직히 밝힙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구성원의 신분이 다양해질수록 신경 쓸 일은 늘어나고 복잡해지는 당연한 수순을 거치는 중이지요.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사도들은 불평과 불만의 파도 속에서 인간적 해결책을 도모하거나 무력하게 표류하지 않고 얼른 하느님의 뜻을 찾아냅니다. 공동체 안에 새로운 협력 방식을 제안하고 또 "온 공동체가 동의"(사도 6,5)한 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뽑아 실질적인 책임을 맡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사도 6,7)
사도행전 저자는 "말씀"이 "자라난다"고 의인화해서 표현합니다. 정작 움직이고 애쓰고 수고하는 이는 사도들인데도, 말씀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사도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원의와 의향을 지닌 것만으로 말씀은 자라납니다. 그 결과 제자 수가 늘고 큰 무리의 사제들이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은 배처럼, 말씀 또한 스스로 자라나 열매를 맺습니다. 배를 목적지에 닿게 한 것이 제자들의 항해술이 아니었듯, 사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라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원의와 지향을 품으면 그뿐입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하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화답송) 인간이 주님을 경외하며 바라면, 주님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 경외와 바람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랄 것은 그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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