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3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아모스3,1-8; 4,11-12/마태오8,23-27)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8; 4,11-12c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3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4 먹이가 없는데도 사자가 숲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잡은 것이 없는데도 힘센 사자가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5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6 성읍 안에서 뿔 나팔이 울리면 사람들이 떨지 않느냐?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
7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8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4,11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니,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마태 8,24)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중에 풍랑을 만납니다. 당황해하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그분을 흔들어 깨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 순간 주무시는 예수님이 무책임하고 무심하고 현실 회피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이 겪는 고통과는 무관하게 계시는 것 같아 야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8,26)
제자들을 두려움과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이 엄밀히 따지면 풍랑이 아니라 믿음의 부재라고 하십니다. 거친 풍랑은 물리적으로 배를 뒤집고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일 수 있습니다. 자연의 포효 앞에 인간은 약할 뿐이니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잠시 잊은 게 하나 있습니다. 곧 지금 자기들과 함께 배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배를 뒤덮는 파도에 너무 놀라고 급박한 나머지 망각해버린 듯합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 또한 더할 수 없이 강합니다. 모든 힘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 신의를 지키려 고통을 자초하고 심지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함으로 얻는 의미가 육적이고 감정적인 모든 것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 8,26)
예수님의 꾸짖음 한 번에 바람과 호수가 입을 다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마는 말씀의 위력이지요. 고요해진 건 바람과 호수만이 아닙니다. 제자들 마음 역시 고요히 가라앉습니다. 이 고요함은 갑자기 생성된 게 아닙니다.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 안에 이미 자리했던 고요입니다. 그 고요가 예수님 밖으로 나와 예수님 안팎으로 번졌을 뿐입니다. 원래 고요하고 다정하고 호의 가득했던 만물이 본래의 제 본성을 되찾은 순간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롯의 구출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죄가 하늘 끝까지 닿은 두 도시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자비' 흥정에도 결국 멸망의 문턱에 다다랐고,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롯을 멸망 한가운데서 내보내 주신"(창세 19,29)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지요.

그런데 롯은 시종일관 망설이고 주저하고 두려워합니다. 천사들의 양해가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싶게 찌질해 보입니다. 집 앞 소동과 기적(창세 19,1-14 참조)을 겪었어도 아직 천사들을 통해 자기 곁에 와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 못합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겠지요.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7)
오히려 롯보다 천사들이 더 적극적이 되어 외치는 이 말은 오늘 우리 실존에 던지는 말씀입니다. 이미 살던 곳의 행태에 익숙해진 이에게 징벌이나 멸망의 예언은 그리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너나 없이 다 죄를 저지르고 살면 죄에 대한 인식의 수위도 함께 내려가게 마련이니까요. 죄와 악의 경계가 흐려지고 느슨해지면서 선과 악이 뒤섞여, '그게 왜?' '우리가 어때서?' '남들 다 그러는데 뭐' 하며 죄가 일반화되고 일상화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감수성이 혼탁해지면 구원의 결정적 초대가 있어도 안락했던 옛 삶에 미련이 생겨 뒤를 돌아보게 되지요. 속속들이 익숙해진 들판에 안주하고 싶고, 내처 뛰어들어가야 할 산은 자기에겐 너무 청정하게 혹은 너무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구원의 초대 앞에서 미련이나 호기심, 의심은 우리를 롯의 아내처럼 쓸모없는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릴 뿐입니다.

롯은 자기 믿음과 공로만으로는 구원을 꿈꿀 수 없었겠지만 늘 조카의 안위를 염려하는 아브라함 덕분에, 그 아브라함을 기억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목숨을 건집니다. 마치 오늘 제자들이 자기 믿음이 아니라 한 배에 오르신 예수님 덕에 고비를 넘긴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벗님 여러분, 우리 바깥에서 요동치는 바람이나 파도, 풍랑이 아니라 우리 안의 믿음이 관건입니다. 주님은 결코 나를 떠나시지도 버리시지도 않는다는 굳은 믿음이 멸망의 순간에도 깨뜨려지지 않는 고요를 낳습니다. 이 고요의 원천으로 되돌아 갑시다. 주무시는 예수님 안에 가득한 고요 속으로 들어갑시다. 주무시는 그분의 평화 속에서 그 믿음이 우리에게도 스며들길 청하며 머무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