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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4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제1독서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인데,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8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명확히 가르십니다.

죽음을 포함해 육신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본능적, 감정적으로 위협이 될 수는 있으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에게는 극복해야 할 피조물일 뿐이지요. 육신과 영혼 모두를 소유하신 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경외하고 사랑해야 할 분이시지요.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기사입니다.


이사야는 환시 중에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 주위에는 사랍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모시는 존재로 알려진 어떤 혼합적 존재라 하는 사랍들의 행동에 머무릅니다.

여섯 날개 중 둘은 얼굴을 가리는데, 감히 주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지극한 경외심을 표현하지요. 날개 둘은 발을 가렸다는데, 고대 중동 언어에서 발은 성기를 완곡하게 표현한다고 하네요. 즉 주님 앞에 감히 내놓기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날개는 온전히 날아다니는 제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는 주님 주변을 맴돌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상징하지요.


거룩한 주님의 현현 앞에서 예언자가 두려움에 싸여 외칩니다. 아마도 그 순간 그에게는 일생을 거쳐 행한 죄스런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겁니다. 이 은혜로운 주님과의 만남의 순간, 아무리 예언자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인지라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불결함을 바라봅니다. 부정한 이, 죄인은 주님을 뵐 수 없으니 그에게는 남은 것은 죽음 뿐입니다.


예언자의 두려움을 감지한 사랍이 "제단에서 타는 숯"을 가져와 그의 입에 댑니다. 주님을 뵈온 이 영광의 순간은 자기 죄악에 자지러져 무너질 때가 아닌 거지요. 숯은 불과 열기로써 그의 "더러운 입술"을 정화합니다. 이 행동은 매우 의미심장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제단에서 타는 숯"은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떠올려 줍니다. 그분은 불타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바치셔서 백성의 죄를 씻으신 분이시지요. 이 희생 제사는 매 미사 때마다 나눠지는 성체와 성혈이고, 또 말씀입니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을 바쳐 우리를 정화하고 또 성화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복음 속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당신이 모든 걸 감내하고 구원하신다는 보증이 담겨 있습니다. 불결한 우리 입에 닿아 다시 깨끗하게 하는 숯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언자에게 하셨듯, 그분은 우리를 쓰시기 위해 우리 두려움의 근거인 자기 비난과 자기 검열의 죄의식을 태워버리십니다.

"두려워하라!"
그리고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만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난 경외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벌을 주기 위해 잘못을 포착하려 주시하는 냉혹한 심판관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의 안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런 분께 우리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사랑으로 정화된 예언자는 조금 전과 백팔십 도 다른 태도로 변화됩니다. 영예로운 만남 앞에서 자기의 부정과 불결함에 두려워 떨던 이가 주님께 먼저 파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비로소 제 질서를 찾은 겁니다. 실패와 몰락, 상실과 소외, 박해와 죽음에 대한 인간적 두려움은 주님을 가리고 제 죄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지만,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를 사랑의 투사로 변모시키지요.

이제 복음 속 제자들도 독서의 예언자처럼 힘 내어 길을 나설 것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자기 죄와 약함을 향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선택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미움과 박해와 죽음의 길을 갈 것입니다. 사랑과 경외가 그 길에 동행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날마다 우리에게 와 닿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날마다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가슴 설레는 주님과의 이 접촉은 뜨거운 일치로 이어지지요.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영혼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묵혀둔 두려움과 근심을 훌훌 털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 우리는 진정 귀하답니다. 주님께서 벗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