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 13,44-52)( 요한 14,7-14)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피조물에 불과한 제자들이(우리가) 신과 만나고 사귀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로 너무 가깝게 지낸 나머지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느님도 함께 만나고 있다는 걸 자주 놓치는 제자들은 성부 하느님을 직접 좀 뵙게 해주십사 예수님께 부탁을 드리지요.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예수님께서 누차 말씀하시듯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분이십니다. 아들을 겪으면서 그 아들이 그대로 따라하는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들을 들음으로써 그 아들이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뜻을 압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요한 14,10.11) 성부와 성자,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깃들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고, 서로를 담고 있습니다. 서로 안에 현존하기에 늘 함께이고 뜻과 생각과 지향과 의지와 마음, 사랑을 공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성부의 말씀과 행적 그대로이기에 뭐가 더 있으신지 따로 더 여쭤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예수님 존재와 말씀, 행적이 곧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요한 14,10)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모두 비우신 채 당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모든 걸 맡기십니다. 절대 선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루시는 모든 일을 완전히 신뢰하고 따르십니다. 어쩌면 예수님 당신이 바로 성부의 선과 사랑의 열매시지요. 예수님께는 성과나 결과보다 철저히 아버지께 내어맡기고 의탁한 채, 오로지 아버지와 하나로 일치하여 나아간 과정이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안티오키아 선교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이틀 전에는 바오로의 입을 통해 구약의 구세사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졌고(사도 13,13-25), 어제는 그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사도 13,26-33), 오늘은 하느님 구원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퍼지게 되는 출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 13,46)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길"에 들어선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모독하고 박해하는 유다인들 앞에서 두 사도는 "이민족을 위해 구원의 빛으로 세워진"(사도 13,47 참조) 자신들의 소명을 당당히 밝힙니다. 이때 놀랍게도 다른 민족 사람들이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합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사도 13,46)해 거부와 배척의 우를 범한 것이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사도 13,47) 이들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 동족에게 박해받고 내쫒기면서도 기쁨과 성령에 가득 차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자기 뜻과 생각으로 말하지 않고 그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움직이시도록 자신을 비웠기에 이런 반응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명예와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움직였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미 자아를 비운 이는 자신을 움직이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기에 성공에 으쓱하거나 실패에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사람들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특히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여전히 기쁨과 성령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그들이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그분이 하시도록 허용하는 영혼은 복됩니다. 일을 시작하신 분이 마치시리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서 있는 그에게서, 모욕도 배척도 실패도 죽음도 그 무엇도 "성령과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부활 제 5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3.05.09 |
---|---|
~ 부활 제 5주일 (생명주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3.05.07 |
~ 부활 제 4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3.05.05 |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3.05.03 |
~ 부활 제 4주일 / 오상선 신부님 ~ (0) | 2023.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