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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 제 5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부활 제5주간 화요일(사도14,19-28)(요한14,27-31ㄱ)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평화"를 참 많이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세례를 받는 가장 흔한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라고 하지요. 실상 인간이 평화를 갈망하고 평화를 많이 이야기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평화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는 뜻도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평화, 주시는 평화는 감정 상태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탈하고 풍족한 데서 오는 편안함, 안정감 정도를 넘어선다는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평화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지요. 예수님께서 곧 '평화의 왕'이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평화"(에페 2,14)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시고 또 주신다고 하시지만, 실상은 당신 자신을 남기시고 또 주시는 겁니다.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의 "성령"을 남기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에 대한 담론에 이어서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요한 14,28)고 하시며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던지십니다. 또 "세상의 우두머리"(요한 14,30)를 언급해 제자들 간담을 서늘하게도 하시고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예수님의 평화가 무탈한 풍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갔다"와 "전하다"는 동사가 반복되며 사도들의 행동 반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들어가고 떠나가고 돌아가고 내려가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 말씀을 전하지요. 자기를 잊고 분주히 오가며 주님의 양떼를 찾아 교회를 꾸려가는 목자의 모습이 숨가쁘게 그려지는데, 초반에 된통 당했던 것같은 사건은 더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설득당한 이방인들에 의해 돌을 맞고 도시 밖에 버려졌지요.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일어나 결국은 이튿날 그곳을 떠납니다. 그의 회생이 기적이었는지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요행이었는지 사도행전 저자가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만, 모르긴 해도 바오로 사도는 이런 일을 앞으로 무수히 겪을 겁니다. 실제로 코린토2서에 나열된 그의 고난과 죽음의 고비(2코린 11,23-27 참조)는 횟수와 강도면에서 사도행전과 서간들에 언급되어 우리가 익히 아는 사건 이상이니까요. 그런 그들이 "선교 활동을 위해 하느님 은총에 맡겨졌던"(사도 14,26)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하느님의 권능을 보고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예수님 열어 주신 것"(사도 14,27)을 찬양하면서요.

사도들의 보고와 찬양 행간에 깃든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를 그곳 교회 신자들이 몰랐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들 역시 "새로운 길"에 들어서서 믿음을 지키며 분투하느라 이미 충분히 겪어내고 있었을 현실이었기에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아도 이해되고 공감되었을 겁니다. 기존 질서와 새로움 사이에는 마찰과 파열, 도전과 갈등이 불가피하니까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요한 14,30)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어둠의 권세가 수난, 고통, 죽음을 통해 당신께 엄습해 와도 당신의 평화를 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악의 얼굴을 하고 시시가각 다가오는 고난의 시간에 대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해서, 아버지의 명령대로, 바로 내가 하는 것"(요한 14,31)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은 세상의 우두머리에 끌려가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온전히 받아 안은 당신의 "길"임을, 사랑의 선택이고, 사랑의 순명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남기시는 평화, 주시는 평화에는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가 없을 수 없습니다. 무탈과 풍요와 안위의 평화가 아닌, 그 실제적 어둠을 딛고 이야기하는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낸 평화라고 할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추구할 때 고통받고 가난하고 억압받고 피흘리는 이들과, 그들이 겪는 처절한 현실들을 건너뛰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해야겠지요. 마치 없는 듯 슬쩍 눙치고 넘어가 중립을 이야기해서도 안됩니다. "평화"는 그 모든 것을 부둥켜안고 개인과 공동체 내면에서 피와 땀과 눈물, 연민과 공감과 통회로 충분히 발효시키고 승화시켜야 비로소 제 향기를 내고 제 빛을 내는 그런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겪어낸 평화를 벗님에게 남기십니다. 벗님이 지금 누리는 평화가 세상의 것인지 그리스도의 것인지, 그리고 벗님 안에 그 평화가 어느 만큼 썪고 발효하고 승화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평화가 벗님과 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주님께서 벗님에게 주고가신 것처럼 벗님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평화의 사람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