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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연중 제 4주일 / 기경호 신부님 ~

사순 4주일/요한 3,14-21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눈길 ♣


봄의 기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상쾌한 공기, 대지로부터 생명이 꿈틀거리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는 이 즈음은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해준다. 교회는 사순 제4주일을 ‘기쁨의 주일’(Dominica laetare)로 정하고 수난을 향한 여정이 고통과 시련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향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래서 오늘의 입당송은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의 위로가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하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면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남은 여정을 더욱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재다짐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빛 자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째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은 결코 우울하고, 슬프고 지겹고 짐스럽기 만한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삶이 인간적으로 고달프고, 힘겹다 해도, 세례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상으로 맞춰 주신 신앙의 안경, 사랑의 안경으로 모든 사건과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그분이 비춰주시는 빛으로 삶을 바라볼 때 뚜렷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여정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하여 곧 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을 찾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고 ‘영혼의 통로’이며, 믿음의 표현이다. 실제 사람이 밖에서 받아들이는 80% 이상의 정보가 눈을 거쳐 들어온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소리 이외의 거의 모든 정보가 눈을 통해 들어오고 눈으로 전달된다. 그렇다보니 무엇을 보며 어떤 마음과 지향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 달라지고, 어디에 눈길이 가 있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오늘날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시선이 사람을 구해 준다는 것이다.”라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우리의 구원은 ‘눈길’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만인의 형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도 ‘눈길’은 매우 중요했다. 눈길에는 무관심한 눈길, 반대만을 바라보는 대상화의 눈길, 적대자만을 바라보는 심문적인 눈길, 위험만을 바라보는 겁에 질린 눈길, 물건만을 바라보는 소유적인 눈길이 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존재들에 열려진 포용성 있는 눈길,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는 친교의 눈길, 그리고 다른 이와 전적으로 합치하는 애정 어린 눈길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주시하였으며 특별히 각 개인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치와 자연, 세계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형제나 다른 존재들을 한 번도 비웃지 않았고, 부끄러움을 주지 않았으며, 조롱하거나 빈정대지 않았고, 분노하거나 면박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열렬한 사랑과 친절에 넘치는 열정으로 다른 존재들을 깊이 있게 바라볼 줄을 알았다. 그의 이러한 눈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수난의 사랑’에 대한 회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것은 상처를 입고 타락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 수없이 많은 볼거리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십자나무 위의 예수님에게서 눈길을 떼지 말아야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그 순간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이 시작된다. 관계단절은 의미 없는 삶,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사업을 벌이는 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요 무의미이며 스스로에 대한 단죄이다.

세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탐욕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순수한 눈길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면 영원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나의 애정어린 눈길 안에 둠으로써 ‘은총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된다.’(에페 2,4) 따라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먼저’, ‘자주’ 바라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신 사랑이신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 ‘주소 없는 눈길’은 죽음을 부를 뿐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어떤 눈길을 지니고 있으며, 나의 눈길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나의 눈길은 과연 믿음의 표현이 되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되고 있는가? 이 사순절에는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나의 눈길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믿음 안에서 포용하는 눈길과 친교의 눈길, 애정어린 눈길을 지니도록....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