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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연중 제 33주간 토요일 / 기경호 신부님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에 있었던 부활에 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들은 유다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귀족계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순수 종교와 동떨어지게 살았으며 외적 신심에는 충실했지만 조상들의 전통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율법을 근거로(신명 25,5-10), 어떤 사람이 아내를 남기고 죽어 그의 형제들이 차례로 형수를 맞아 대를 이으려다가 모두 죽으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받아들이는 율법을 근거로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으며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20,35-38)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란 육신이 되살아나고 영혼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생명과 영원성을 살게 되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활은 육체적인 차원,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묶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부활과 사후세계, 영원한 생명을 부인하거나 그런 것에 관심을 끄고 살아가는 현실주의자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고 복음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향은 필연코 물질과 돈을 중시하고 현세의 쾌락과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몰두하고 현세에 대한 애착이 커 남의 처지에도 무관심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두가이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현실주의는 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며 그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출발점이나 목표가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상계인 셈입니다. 가시적이고 감각적이며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니 영원성과는 동떨어진 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니 현세 물질이나 돈,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안달복달하지 않게 되지요. 부활의 삶은 어떤 처지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가난하지만 영원히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늘 하느님 앞에 있음을 자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포기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일상의 죽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시며, 우리 또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오늘도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이런 믿음 속에 현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