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1-22)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다
주님께서는 성령의 은총으로 그들을 성별하시고 사도의 위엄을 입혀 파견하셨습니다.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능력도주셨지요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돌아온 그들이 보고를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많은 사람을 도운 일과 무엇보다도 당신의 영광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을 아시고 크게 기삐하셨습니다. 주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기 바라시므로, 그릇된 길로 가던 자들이 돌아서고 어둠에 있던 자들이 깨어나고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 없던 자들이 당신의 영광을 알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나 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밝고 투명하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무를 보는 것이다. 눈이 멀어서 대상을 볼 수 없을 때, 무를 보거나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엑카르트는 설교 12에서 부정의 길을 전개하면서 하느님을 일컬어 “이름 없는 무” 라고 불렀다. 무를 볼 수 없는 자는 이름 없는 무, 곧 하느님을 볼 수 없다. 대상은 우리의 눈을 가려 아무개가 아닌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느님만이 이름 없는 무인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영혼도 이름이 없다. “하느님의 성전인 사람의 의식도 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지성은 존재의 반대쪽이며 비존재의 형태를 띤다 "왜냐하면 지성은 존재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은 대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보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보편들은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성의 산물은 ”비존재”다. 엑카르트는 철학적 노작 <파리 문집>에서 다움과 같이 말한다. “지성에 속한 것들은 자체로는 비존재다." 지성이 존재에게 단단히 묶여 있다면 그런 지성은 존재를 숙고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은 무다”라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 카푸토는 “지성이야말로 존재를 알 수 있는, 더없이 개방된 능력이다”라고 논평한다. 지성은 순수한 잠재력이다. 지성이 아무개를 알 수 있는 것은 지성이 아무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그것이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답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넘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 엑카르트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잠재력이 들어 있다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우리 안에 무가 들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289)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올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저는 마리아께서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의 마음을 지니고 싶나이다. 이제 당신 사랑 속에서 성부와 당신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나이다.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께 협력하고 싶습니다. 오, 예수님! 저는 당신이 주시는 은총의 시간을 온 마음 다해 감사하게 받이들이며 기꺼이 따를 것을 약속합니다. 당신이 제 인생 계획을 갖고 계심을 믿습니다.
0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의 계획 속에 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계심을 믿나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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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41203. 00:47 ㅣNo.178128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양대 산맥으로 구성돼 있는 듯합니다. 정의로운 판단과 판결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가 하는 주제로 함축시켜서 묵상하다 보면 새로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생활묵상 글 하나를 올리게 됐습니다. 그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다시 한 번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자 합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을 듣고 싶어합니다. 인지상정입니다.
오늘 복음을 큰 틀에서 보면 지혜와 슬기가 충만한 자와 철부지를 대비시키고 또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대비시켜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흥미롭습니다. 왜 당신께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시고, 지혜롭고 슬기를 가진 자들에게는 감추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슬기로운 자들에게 무엇을 드러내 가르치셔도 가르치셔야 하는 게 보통의 상식으로 이해를 했을 때 수긍이 가는 대목이라 그렇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될 때는 역발상을 하면 해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과 복음은 누가 더 잘 이해를 하고 다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그냥 통상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신앙과 복음을 말합니다. 지식이나 학문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더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이해를 하고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과 믿음은 머리로 이해를 잘 한다고 해서만이 신앙이 훌륭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지요? 저는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좀 안다고 하는 자만이라든지 이런 교만이 자칫 신앙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지혜가 필요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혜가 지식이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 겸손한 자세로 잘 받아들인다면 그처럼 금상첨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있으면 이건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사람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군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걸 뭔가 과시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아니면 실제 의식을 하면서 남에게 가르쳐준다고 하는 형식을 취하려고 하는 교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다는 게 실제 숨기려고 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드러낸다고 해도 그걸 잘 받아들이고 하면 문제가 없을 텐데 오히려 조금 전에와 같은 그런 교만이 있게 되면 그 교만이란 것 때문에 진실된 복음의 가치를 자칫 잘못 볼 경우가 있고 그게 잘못 전달될 수가 있어서 어쩌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숨겨질 수가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한 가지 역으로 말해 왜 철부지에게 드러내실까 하는 점을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철부지에게 드러내면 공염불에 불과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철부지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흰색 도화지처럼 그 도화지에 뭔가 그리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준주성범에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이와 같은 사람이 더 잘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때가 안 묻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좀 안다고 했을 때 마치 그 조금 아는 알량한 지식으로 남보다 좀 더 잘 안다고 해서 마치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오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신앙과 복음은 순수해야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순진하다는 말은 원래는 좋은 뜻이지만 이게 시대가 변화면서 좋은 뜻으로만 사용되는 게 아니고 부정적인 뜻으로 약간 변질된 면도 있습니다. 약간 멍청한 면이 있다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 설령 요즘 세상에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신앙과 복음은 그런 사람이 어쩌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강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을 이해해야 할지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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