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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이영근 신부님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통해서, 빛이신 예수님이 선포됩니다. 그가 자신을 증언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은 그 자신을 비운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절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상대에게로 건너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그토록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하였을까요?

자신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지 않고 상대를 향하여 있었던 까닭일 것입니다.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한은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신랑을 향하여 있을 때라야 신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가 친구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었습니다.”(요한 3,29)

 

 

 

그렇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친구를 향한 까닭입니다. 친구인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할 때 우리는 비어집니다.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친구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떠나와 우리를 ‘친구’(요한 15,15)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역시 그분을 ‘친구’라 부를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때일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당신을 향하여 나아가는 바람에 자신에게서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향하여’ 희망을 두고 있는가? 오늘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랑’과 ‘신부’의 성경적 표상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상합니다(예레미아, 에제키엘, 호세아). 그리고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또한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자의 영혼과의 사랑을 아름답게 비유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