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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이수철 신부님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여정

“회심과 복음 선포”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오늘은 성 바오로 회심 축일이자 일치 주간의 마지막날입니다. 그리스도교 일치 주간은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교회 일치를 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주간으로 매년 1월18일부터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오늘 1월25일까지 8일 동안 거행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치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아 1968년부터 한국기독교협의회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함께 일치기도주간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일치의 중심에 바오로 사도의 결정적 회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성 스테파노의 죽음시 순교상황을 그대로 목격했던 열렬한 박해자 사울이 결정적으로 회심하여 바오로로 전환된, 참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 획기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제 종파를 초월해 모든 갈린 그리스도교인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회심과 복음선포의 모범이, 일치의 중심이 성 바오로 사도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 없는 예수님의 그리스도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제1독서에서 사울의 회심 장면이 너무 극적이요 생생합니다. 해마다 읽고 묵상하는 내용이지만 그때마다 신선한 충격입니다. 사울의 결정적 회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한없이 기다리고 인내하며 그 때를 기다렸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가 친히 전해주는 회심 장면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입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바오로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아마도 평생 예수님과의 첫 만남과 더불어 이 회심 체험은 평생 늘 바오로의 신앙을 새로이 했을 것이며 회심의 여정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박해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새삼 우리가 형제들을 박해하는 경우는 그대로 예수님을 박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로 사울이 회심했음을 알리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회심 직후 우리가 저절로 묻게되는 즉각적인 질문입니다. 지금같이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주님의 눈부신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사울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갑니다. 하느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사울이요 즉시 하느님의 사람, 하나니아스에게 인계되니 그가 주님께 받아 전하는 충고도 감동적입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참으로 사울의 감동적 회심 장면은 언제 읽어도 늘 새로운 영감이 됩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결정적 회심에 이른 사울은 옛 사울이 아닙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새로난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은 사울을 당신 복음 선포의 증인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의 비상한 회심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사울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울을 선택했듯이 우리 믿는 이들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우연한 나의 선택이 아닌 주님의 필연적 선택으로 세례와 더불어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의 복된 신원입니다. 사울에서 바오로가 된 것처럼 우리 각자도 새롭게 태어난 세례명도 지니게 된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탄생에 이은 영적탄생이요 복된 죽음은 천상탄생이 됩니다.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 사건은 우리의 회심과 세례를 상기하게 하며, 우리의 계속될 회심의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오로와 같은 비상한 회심 체험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평생 계속될 회심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한두번의 회심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회심의 여정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심의 여정과 더불어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끊임없는 회심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문득 11년전 배밭에서 일하다 순직과도 같이 새상을 떠난 정훈만 세례자 요한 형제가 수도원 정자에 만들어 붙인 ‘회심정(回心亭)’이란 명패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회심의 중요성입니다.

 

 

 

회심이 끝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회심으로 끝나면 반쪽입니다. 완전한 회심은, 회심의 완성은 복음 선포를 통해 이뤄집니다. 회심은 끊임없이 복음 선포를 지향하며, 복음 선포는 부단한 회심을 요구합니다. 흡사 관상과 활동이 함께 가듯 회심과 복음선포의 선교는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최고의 애덕형태가 복음 선포요 그대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사람들을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새삼 내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선포의 현장임을 깨닫습니다. 정주(定住)의 삶을 사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삶자체가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삶’이겠습니다. 회심을 늘 새롭게 하는 복음선포의 활동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주님을 선포하는 것이요, 우리의 삶자체가 주님 파스카의 삶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놀랍고 감사한 것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심의 여정에, 복음선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회심의 여정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기도시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원래 사랑의 강에 회심의 강, 복음선포의 강을 추가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회심의 강(江)'이, '복음선포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