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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송영진 신부님 ~

<연중 제3주간 화요일 강론>(2025. 1. 28. 화)(마르 3,31-35)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1) 앞의 20절-21절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에게 온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이 번역만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 되는데,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붙잡으러 나섰다.’는 ‘집으로 모셔가려고 했다.’입니다.

 

<친척들은, 또는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너무 바쁜 생활을 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혹사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는 여러 가지 나쁜 소문들을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20절-21절의 ‘친척들’과 31절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모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더욱더 아니고, ‘여러 가지로 걱정스러워서’일 것입니다. 제대로 식사도 못하시고 일만 하시는 예수님이......

2)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들은 내 어머니가 아니고 내 형제들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혈육을 부정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 또는 ‘영적인 가족’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참 가족’이다.”, 또는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나를 믿어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씀에 ‘내 어머니처럼’이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두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전에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ㄹ-12).” 쭉정이는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고, ‘알곡’은 그 자격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알곡들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4)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말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6-17).” 여기서 “그분께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곧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곧 생활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