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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주간 화요일 / 전삼용 신부님 ~

2025년 1월 28일 다해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마르코 3,31-35)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의 강론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 ”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