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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주간 수요일 - 설 / 이수철 신부님 ~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받은 삶

“감사하라, 겸손하라, 깨어 있어라”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가장 많이 주고 받는 인사일 것입니다. 올해 설날 29일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이 눈내린 말그대로 눈 ‘설(雪)’자 ‘雪날’이 되었으니 웬지 모를 좋은 느낌이 듭니다. 순수의 축복으로 빛나는 흰눈덮인 수도원 주변의 산야를 보니 혼란의 진통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나라도 새롭게 웅비하는 한해가 되리라는 희망이 샘솟는 느낌입니다. 작년 후반부터 불암산앞에 설 때 마다 저를 행복하게 하는, 수없이 나눴던 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삶도 행복도 선택입니다. 누구나 축복받은 삶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축복이요, 이렇게 살아있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찾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고 있는지 삶인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정의는 축복받은 존재요,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공의 길은 다양하지만 실패의 길은 포기 하나뿐입니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거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축복의 길을 찾아, 다시 희망차게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 인터넷에서 유익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설날의 다짐, 뇌를 썩게 하지 않겠다. 소셜 미디어 중독의 폐해...저급한 온라인 콘텐츠에 매몰되지 않고 외로움에 익숙해 지련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2024년 단어로 ‘Brain rot’(뇌 썩음)을 꼽았다. 이 단어는 저급한 온라인 콘텐츠, 특히 소셜미디어의 과잉소비로 초래되는 영향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사소하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자료를 과도하게 소비한 결과, 정신적 지적 상태가 퇴보하는 현상이다. ‘뇌썩음’(Brain rot) 이란 표현은 1854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서 <월든>에서 사용했다.”

 

 

 

참 중요한 깨우침입니다. 소셜미디어의 중독으로 아까운 축복인생 손실을 끼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가 축복받은 존재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민수기 말씀대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얼마나 멋진 하느님의 축복인지요. 어떻게 하면 축복받은 존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감사하라!" 입니다.

 

하느님 축복에 대한 당연하고 자연스런 응답이 반응입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믿는 이들의 우선적 특징이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할 때 축복도 계속 받습니다.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축복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감사로 가득한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감사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감사를 강조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감사할 때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이지만 불평할 때는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남았네!’ 하면 낙관적 만족의 사람이요, ‘벌써 이렇게 썼네.’ 부정적 불만의 사람입니다.

 

 

 

둘째, "겸손하라!" 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영성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침묵, 경청, 겸손, 순종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사람(homo)이자 겸손(humilitas)입니다. 흙같이 겸손해서 사람입니다. 사람됨의 본바탈이 겸손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이 지혜입니다. 무지의 교만이요 지혜의 겸손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몰라서 교만의 자랑이지 알면 겸손히 감사합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겸손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연기처럼, 안개처럼, 구름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인생입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입니다.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자랑하려가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요,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루하루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어떠하든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일뿐입니다.

 

 

 

셋째, "깨어 있어라!" 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감사요 겸손입니다. 깨어 있을 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감사하며 겸손히 살 수 있습니다. 과연 제정신으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사는 자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자기를 잊고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성당 뒷벽의 양쪽 올빼미 눈 역시 깨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도 온통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막연히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찾아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아니 주님은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도대체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깨어 있음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도 참 좋은 영성생활의 방법입니다. 향심기도, 명상기도, 비움기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매일의 공동전례기도등 모두가 깨어 있음의 참 좋은 영성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받은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감사하는 삶, 겸손한 삶, 깨어 있는 삶을 삽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축복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늘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