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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3주간 목요일 / 조재형 신부님 ~

사순 제 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은 검색을 통해서 정보를 찾게 됩니다. 인공지능이 내재 된 검색엔진은 비슷한 것을 검색할 수 있도록 보여줍니다. 뉴스를 검색하면 뉴스가 화면에 먼저 나옵니다. 음악을 검색하면 음악이 화면에 먼저 나옵니다. 인문학을 검색하면 인문학에 관련된 내용이 화면에 먼저 나옵니다. 우연히 다용도 가구를 검색했더니, 다용도 가구를 소개하는 화면이 먼나 나왔습니다. 의자인데 사다리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도 있었고, 소파인데 침대가 될 수 있는 가구도 있었습니다. 탁자인데 서랍장이 되는 가구도 있었습니다. 하나의 모습인데,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더 멋진 변신이 있습니다.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는 로봇이 자동차로 변하기도 합니다. 변신이라는 면에서 잘 알려진 동물도 있습니다. ‘카멜레온’입니다. 카멜레온은 몸의 색을 보호색으로 바꿀 수 있어서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성은 청순하게도, 화려하게도, 지적으로도, 활동적으로도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변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매미는 7년 동안 애벌레로 있다가 매가가 된다고 합니다. 여름에 듣는 매미의 노래는 7년을 기다려온 기쁨의 노래일 겁니다. 변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나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예쁜 나비가 됩니다. 변신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저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더 높은 곳을 향한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더 낮은 곳을 향한 변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더 멋진 모습과 더 큰 능력을 지닌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의 변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본능에 의한, 자연의 법칙에 의한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에 의한 변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변신은 예수님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은총과 자비의 변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과 예수님의 모습은 화려하고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박해와 멸시를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신앙인의 변신은 겉모습의 변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의 변신은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변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의 변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변신이어야 합니다. 그 변신 때문에 박해를 받을지라도, 그 변신 때문에 모욕을 당할지라도, 그 변신 때문에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변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야는 아무것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습니다.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짓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