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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 정인준 신부님 ~

 3월 28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법”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서민들보다는 율사들의 특권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토라에 대한 율법학자들은 법률 전문 해석 인으로 서민들에게 해석을 해주는 것인데, 전체 성경의 내용보다는 조목조목 율법에 저촉되는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인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법무사와 법률관계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서민은 법 정신보다는
자기의 입장에서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당면한 문제를 해석하는 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법무사에 가면 돈을 내듯이 율법학자들에게 문의하는 데에도 많은 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서민은 이래저래 어렵고 토라에 대해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토라를 일상생활에서 해석했던 후대 장기간의 작품인 탈무드를 보아서도 서민이 안식일 법에
무게를 두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개의 항목에서 또 다시 안식에 대한 규정이
독립해서 한 권의 책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읽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긴 겉옷을 입고 다니고 사람들로부터 권위있는 사람,
높은 사람으로 대접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존경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서 무료나 저가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 토라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는 바리사이들도 여기에 합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학자들 뿐 아니라 바리사이의 위선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권위 있는 대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중에
한 사람은 토론을 벌여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공개토론이 되어 버린
자리에서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을 대라고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명석하게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을
설명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자부심을 가졌던 율법학자도 주님의 말씀에 감탄을 합니다. 형식적인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실제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하는
율법학자를 보시며 그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율법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말씀 을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입으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거룩한 사순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