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4주간 금요일 / 정인준 신부님 ~

4월 4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그분의 때가 아직”


우리는 생활하다보면 때로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곧잘 그 말을 맞받아쳐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라는 말이 입에서 거리낌 없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듯 남이 억울한 소리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억울라지치면 불평에다 호소하기 바쁜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정의로 본다면 억울한 사람이 없이 모두 공평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런 주제에서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며 당연히 욥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의인으로 여기셨던 그가 아무 잘못도 없이 마귀의 괴롭힘을 겪고
친구들에게까지 따돌림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의인의 고통’이 주제 중에 하나가 됩니다. 구약에서 굵직하게 이어주는 주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들은 욥에게 이 원리를 가지고
‘무슨 죄를 졌으니까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다.’라며 몰아 부칩니다.

욥은 친구들과 논쟁을 하지만 그럴수록 욥은 고통을 늪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후에 하느님께서 욥을 구하시고 도움은커녕 어쭙지 않은 논리를 가지고 친구를
괴롭힌 댓가로 벌을 내리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인인 욥의 청원으로 벌을 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시로 창세기의 요셉을 또한 꼽지요. 그는 아무 죄도 없이 미디안
상인들 손에 넘어가서 이집트 경호 대장 포티파르 집으로 노예가 되어 파란만장의
삶을 삽니다.



우리는 지금도 ‘어떻게 억울한 소리 듣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듣습니다.
오늘 독서인 지혜서에서도 악인은 의인을 괴롭히며 폄하합니다.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떠듭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지혜 2,8.19)

의인에 대한 질투가 불러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이지요. 그러나 지혜서 저자는 그렇게
떠드는 악인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악인들을 반대하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21-22절)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께 서서히 수난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분간 드러나게
다니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신분을 드러내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합니다.



몸을 감추시던 주님께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유다인들은 주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아직 주님의 때가 아니라 그들의 손에서 피하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고통들 속에 갇히게 되면 누구나 실망스럽고 또 하느님의 외면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우리 삶의 어두운 고통과 실망을 주님의
십자가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힘겨운 고통의 순간이라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 함께 하려고 하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펼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을 주님이 십자가로 바꾸어 볼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을 잡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해 구김없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발자국을 따르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