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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4주간 토요일 / 이수철 신부님 ~

사순 제 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출구’는 하느님

“기도와 회개”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지혜롭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내 것으로 착각하면 세상에 휩쓸려 나를 잃게 된다. 한 번 잃어버린 나는 두 번 다시 찾기 어렵다.”<다산>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 중심의 초연하고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화해 주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항상 관직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한다면 그 어떤 것도 못할 것이 없다.”<논어>

무질서한 집착이 만악의 근원임을 깨닫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예수님이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마침내 기도를 통해 구원의 출구를 찾아낸 예레미야의 고투가 감동적인 교훈입니다. 아주 예전 장상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문이 닫혔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한쪽 문이 닫혀 있으면 한쪽 문은 열려 있기 마련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구원의 출구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누누히 하느님께 네 희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예레미야의 첫 번째 하느님 향한 고백입니다. 예레미야에게 구원의 출구인 하느님과의 대화는 일상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들에 대한 악인들의 박해는 거의 숙명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악인들의 예레미야에 대한 결의입니다. 참으로 사악하고 잔혹한 악인들입니다. 바로 이를 알아차린 예레미야입니다.

 

 

 

“저 나무를 베어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이런 악인들과의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지혜롭게 구원의 출구인 하느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이래서 참으로 ‘살기 위해’ 늘 기도와 회개의 삶을 통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구원의 출구인 하느님과의 소통이 절대적입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하여 주소서.”

 

 

 

매사 최선을 다하되 복수는 내가 아닌 공의로운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겸손한 믿음이자 지혜입니다. 아무리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속에도 희망의 하느님은 구원의 출구로서 늘 함께 하십니다. 바로 기도와 회개를 통해 눈이 열릴 때 지금 여기서 발견되는 구원의 출구이신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예레미야처럼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고 두편의 반응을 통해 예수님의 건재하심을 깨닫습니다. 양쪽의 반응이 극단적입니다. “저분은 참으로 예언자시다. 메시아시다.”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도 두 패로 갈라 집니다.

 

 

 

이어지는 성전 경비병의 증언에도, 니코데모의 예수님께 대한 호의적인 충고에도 불구하고 무지에 눈이 가린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참 완고하고 완강합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개가 필요한 바리사이들입니다. 성전 경비병들에게는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질책하고, 니코데모에게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하며 질책합니다.

 

 

 

이런 무지하고 완고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만났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것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은총으로 구원의 출구 하느님을 만났다면 즉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의 신원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대해 적대적이며 무지한 악인들이나. 예수님을 극구 부인하는 무지한 바리사이들 역시 우리 무지한 인간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부단한 하느님 공부와 기도와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이런 평생 ‘깨달음의 여정’을 통한 은총이 날로 우리를 무지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지혜롭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