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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주간 월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성주간 월요일 강론>(2025. 4. 14. 월)(요한 12,1-11)


제1독서
<그는 외치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2,1-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시니......』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회가 재판 절차도 없이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고, 지명수배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는데, 신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위한 송별 식사였습니다.

<신자들 쪽에서 준비한, 또 하나의 ‘최후의 만찬’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잔치는 결코 즐거운 잔치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침통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경우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마리아의 경우에는 향유를 준비하는 것으로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을 드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거행하려고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당신의 장례를 미리 치르는 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7절의 ‘내 장례 날’이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2)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향유가 아니라, 또 향유를 가져온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보지 않고 향유만 본다면 배반자 유다처럼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추거나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3) 마리아의 행동은, ‘가장 큰 계명’에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ㄴ).” <이 말에서 ‘끝까지’는 ‘극진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과 사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을 배반한 유다도 사랑하셨고, 당신을 박해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전부 다 바친 사랑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일입니다.

4) 마리아를 향해서, “왜 주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마리아가 평소에 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지금’은 죽음을 앞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가난한 이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마리아에게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이들’을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람들’로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도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