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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10주간 목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관상적인 자세로 질문하며 성서를 읽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6월 11일 수요일 - 스물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관상적 독서

 

우리는 성서가 우리를 회심으로 이끌게 하고 또 우리를 변화하게 하는가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성서를 읽는 고대 유대인들의 방식인 midrash(미드라쉬)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독서법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기보다는 성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무엇을 강조해서 보아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덜 강조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주의와 문자주의를 넘어서 미드라쉬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주석법을 실천하셨는데, 이 주석법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질문들을 한결같이 사용하며 종종 하나의 본문을 성찰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질문들에 대해 더 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 의미를 찾게 해주는 주석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방하여 이런 주석법으로 성서를 읽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방식으로 성서를 읽었다면 수세기에 걸친 의로움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종교적 폭력, 심지어는 우리 교회의 독단적 노선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미드라쉬라는 유대교 실천법은 언제나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답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믿음으로 가득 찬 차원의 의미를 많이 찾게 해줍니다. 이 의미들이란 독자들인 여러분의 삶에 관련되고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고 주체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이해하게 해주며, 성서와 여러분이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는 것들입니다. 우선은 그 내용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전이 되기보다는 여러분 자신에게 도전이 되게 합니다. 영적인 방식으로 본문을 읽음으로써 -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 그 내용이 여러분을 회심으로 이끌고 변화하게 해주며 성장하게 해줍니다: 이 내용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내용이 '내' 삶과 '내' 가족, '내' 교회, '내' 마을, '내' 나라, 그리고 우리 세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1]

리처드 신부는 성서를 관상의 자세로 읽는 몇 가지 단계를 알려줍니다:

☞ 중요한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성령께 이끄심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십시오. 이 기도는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대로 해석하려는 에고의 경향을 내려놓기 위한 것입니다. 내면에서 지성의 자유를 느끼고 세상적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 어느 정도 진솔하게 지성과 감성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면 우리 자신의 뜻과 에고의 목적, 필요, 바람을 내려놓으려는 마음 자세를 갖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 그런 다음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더 깊은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만일 그 목소리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거나 놀라게 하지 않고, 도전은 되더라도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목소리라면, 그것은 우리 에고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 목소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가 우리의 허상과 폭력성을 완전하고 자연스럽게 몰아내 주어서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느낌들과 우리를 동일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대체해 주시는 치유법이라고 부릅니다.

☞ 이 경험이 우리의 참 자아로 하여금 갈라티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 - 즉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 을 경험하게 해준다면, 우리는 이 해석이 성령, 즉 지혜의 더 깊은 흐름에서 오는 것임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하는 해석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이나 벌을 받는 듯한 감정 - 즉 우월감이나 자기-만족, 오만한 이원론적 확신, 복수하려는 갈망, 이기고자 하는 욕망, 무시나 배척의 정신과 같은 것들 - 이 떠오른다면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고가 여전히 우리가 타고 있는 배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비-이원론적 글들은 저로 하여금 하느님을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제삼의 성으로 이해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저는 요즘 우리 사회 안에서 성소수자들과 관련한 증오와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봅니다. 제 막내 자식은 이분법적 성별을 뛰어넘어 있는(non-binary) 아이인데, 저는 이 세상에서 이 아이보다 더 동정심이 깊고 사랑스러우며 비평적이지 않은 영혼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 아이에게서 사랑을 배우듯이, 우리는 서로에게서 사랑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이분법적 성을 뛰어넘는 분으로 받아들인다면 서로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Mary D.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Midrash,” Daily Meditations, January 7, 2019.

[2]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Do We Do with the Bible? (CAC Publishing, 2018), 52–5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Spratt,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의 고요한 증거를 통해 말씀과 이미지가 연결되는 문턱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내면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고 성령께서 우리 주의를 이끌어 조용하게 꽃을 피우도록 초대해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