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주, 셋째 날
믿음의 축복
창세기 22,1-18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하고 나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장작 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고들 한다.
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해설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 느릿느릿 힘들게 산길을 오르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의 눈은 긴장되어 있으며 눈물이 고여 있다. 감히 하늘을 올려다 보지도 못하는 양 땅만 내려다 보고 있다. 불타는 숯을 담은 까만 불통을 메고 있으며, 허리띠에는 칼이 보인다.
어린 소년이 그 노인의 곁에서 묵묵히 걷고 있다. 소년의 어깨 위에는 무거운 나무 짐이 얹혀 있다. 나무가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서 발걸음이 불안정하고 하마터면 넘어질뻔 한다. 소년의 얼굴에는 당황하고 두려운 빛이 역력하다. 소년은 왜 이렇게 짐을 메고 산을 오르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를 쳐다본다.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사악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자식 보기를 포기했으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의해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실현되었다.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늙어서 아이를 가지게 된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과 사라도 ‘늦자식’에 대해 희열을 느꼈다.
아브라함은 한 차원 다른 기쁨을 더 느끼게 되었으니, 특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사악은 장래의 보증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서 시작하신 일, 즉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형성되고 통일된 민족을 일으키는 일을 이사악을 통해 지속적으로 계속하시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아이를 죽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명하신다.
아브라함에게 관계되는 모든 것이 이 지시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브라함의 존재 전체가 역설적인 충격으로 비틀거린다.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보내 주셨는데, 이제 그의 죽음을 요구하시고, 그나마 아브라함의 손으로 죽이기를 바라시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브라함은 갈림길에 서 있다. 최종적인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요구에 흔쾌히 순응하여, 전혀 종잡을 수 없는 미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예상과 합리적인 예측을 팽개칠 만한 용기가 아브라함에게 있을까?
불행히도 이 설화는 보통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여 주는 한 예화로 제시되는데 그치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시대에 일반화되어 있던 어린이 희생제사를 반대하는 주장에 그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설화가 특히 의미깊은 것은 주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는 본보기 내지 표본이 되는 철저한 개인적인 체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체험은 성숙한 자기 희생과 헌신의 핵심을 이루는 ‘순종’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목적이 하느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서둘러 이사악을 구하시고 사태가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브라함도 달라졌고 이사악도 달라졌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을 때, 그들을 통해 성성(聖性)과 완전성(完全性)을 향한 인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창세기다.
아버지가 극진히 아끼는 이사악이 무거운 나무짐을 지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연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한 19,17)
기도안내 : 불타는 떨기 앞에서
매일기도 양식 : ‘매일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참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긴장을 풀고 조용히 자신을 가라앉힌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의존성을 분명히 한다.
구하는 은총
자유의 은총, 즉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시든지 기꺼이 “예”하며 분명하게 응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기도방법 : ‘여러가지 형태의 혼자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중에서 [관상] 참조.
나 자신을 하느님의 지시에 응답하는 아브라함이라고 상상한다. 이 설화를 더 자세한 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나의 모든 오관을 동원하여 실제 현장 속에 들어간다.
마음을 결정하는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특별히 느낀다.
나의 반응은 어떠할까? 나도 하느님의 지시에 믿음을 가지고 따를 수 있을까?
주님의 기도로 기도를 마친다.
기도 후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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