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주, 첫째 날
옹기장이의 선택
로마 9,20~21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해설
자신이 옹기장이 작업장의 선반에 놓여 있는 그릇이라고 상상한다. 이 선반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다른 그릇은 한 번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마치 생전 처음 보듯이 자신이 다른 그릇들을 새롭게 주시하고 있음을 느낀다.
둘째 선반에 놓여 있는 아주 우아한 그릇이 바로 나의 눈에 들어온다. 그 그릇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 고운 하얀 진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티끌만한 흠도 없는 것 같다.
한구석을 보니 못생긴 조그마한 그릇이 눈에 띈다. 옹기장이가 못생긴 이 그릇을 왜 버리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남겨둘 가치가 없는 그릇처럼 보인다.
이 두 그릇을 보며 너무나 큰 차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나서 내 자신을 둘러보며 갑자기 나 자신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털 같은 금이 위에서 아래로 쫙 나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겁에 질려서 나의 본질적인 가치와 쓸모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내 안에 뭔가 담아 둘 수 있을까?
완벽한 그릇을 보고 시기심이 생긴다. 왜 옹기장이가 나를 이렇게 못 만들었을까? 나를 만드신 날, 몸이 불편하셨는가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으셨는가?
옹기장이를 기억한다. 그의 부드러운 얼굴과 사랑스러운 눈과, 진흙덩이를 떼내서 반죽하여 빚으실 때의 가느다라면서 능란한 그의 손가락을 다시 바라본다. 선반 위 내 자리에서 그분을 몇 년 동안 지켜보아 왔기 때문에 그분이 사랑으로 만들지 않으신 것이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항상 그는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진흙을 ‘빚어 만드신다.’
완벽한 그릇에 쏟으신 사랑만큼 못생긴 그릇에게도 똑같은 사랑을 쏟아 부으셨다.
지금 현재로서는, 하나는 완벽한데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은 무슨 목적을 위해서일까? 금이 간 그릇이긴 하지만 나도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가치는 나의 완전한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는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잘 알게 되었다.
기도안내 : 순종
매일기도 양식 : ‘매일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참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긴장을 풀고 조용히 자신을 가라앉힌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의존성을 분명히 한다.
구하는 은총
자유의 은총, 즉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시든지 기꺼이 “예”하며 분명하게 응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기도방법 : ‘여러가지 형태의 혼자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중에서 [관상] 참조.
해설을 천천히 읽는다. 자신이 깨어졌다는 것을 방금 발견한 그릇으로서의 나 자신을 상상해 본다. 그릇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듯이 똑같은 질문을 나 스스로 해본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와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자유롭게 내 자신을 맡기겠다는 나의 소망을 발하며 기도를 끝마친다.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기도 후 반성
이 기도 중에 알게 된 모든 느낌, 체험 또는 깨달음들을 영적일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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