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주, 둘째 날
신앙
히브리 11,17-19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나가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이 되었습니다.
해설
내가 처한 환경에 의해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 임무나 일, 계획을 떠맡게 되었다는 느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모든 것이 적절하게 보이며 때가 무르익은 것 같다. 아마도 집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거나,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거나, 학교로 돌아가거나, 책을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인생의 진로가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서 나 자신이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 일이라고 주장한다. 인생의 진로를 철저히 받아들였기에 그것은 하느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나누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활동하시는 외적인 표현이 된다.
나의 진로를 따라 시작은 했지만, 장애물이 돌출하고 출구가 막힌 것처럼 보인다. 수업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싸고 직업 선택은 한계가 있다.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주제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간다. 다소 뒤로 주춤 물러서거나 속도를 늦출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일한다.
나의 꿈을 믿기에 참고 견디며, 나에게 필요한 재능은 다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장애물을 만나게 될 때는, 어떻게 나의 꿈이 성취될지 알 도리가 없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이란 단어는 사랑이란 단어와 같이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지나칠 정도로 과용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지성적인 동의 정도로 낮추어 보며, 신앙을 머리의 수준에서 마음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앙 표본의 한 예로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들고 있는데, 그의 신앙은 외아들 이사악의 목숨을 요구하신 하느님께 순종할 때 잘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 약속이 걸려 있는 아이의 목숨을 하느님께서 왜 취하시려고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에서 역설적으로 흘러 나오는 죽음과 어둠의 세력 속에 빠지게 된다.
어떤 것들은 세월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신앙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신앙이며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각자 ‘이사악’을 나름대로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과 사물로서, 우리는 그것을 궁극적인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길 때에야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와 힘이 발휘된다.
희생되는 이사악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신비의 상징을 보게 된다.
기도안내 : 이사악과의 만남
매일기도 양식 : ‘매일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참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긴장을 풀고 조용히 자신을 가라앉힌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의존성을 분명히 한다.
구하는 은총
자유의 은총, 즉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시든지 기꺼이 “예”하며 분명하게 응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한다.
기도방법 : ‘여러가지 형태의 혼자 기도하는 방법’ 게시물 중에서 [묵상] 참조.
다음과 같은 점을 숙고한다.
나의 삶 속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인가? ... 자식인가? ... 직업인가? ... 꿈인가? ... 건강인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라보고 안아 주었듯이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것을 바라본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어떤 것인가?
하느님께 ‘나의 이사악’에 관해 말씀드린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하느님께 말씀드린다. 그것이 하느님께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의 하느님께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에게 이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
만약에 가능하다면 나의 이사악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이사악을 다시 돌려받는다.
만약 나의 이사악을 봉헌할 수 없다면 기꺼이 봉헌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겸손히 부탁한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를 마친다.
기도 후 반성
이 기도 중에 알게 된 모든 느낌, 체험 또는 깨달음들을 영적일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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