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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스크랩] 제9장 용서에 관하여(1)

 

 

 

제9장  용서에 관하여(1)

 

 

   이번에는 '용서'에 관하여 살펴보자.  '주님의 기도'는 거의 하느님에게 청원하는 기도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단 한 가지만 인간이 행해야 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무엇이 용서가 아닌가에 관하여 알아보자. 참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한 번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열 번 정도는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면 언젠가 참지 못하고 분노와 원한이 푹뱔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도 용서가 아니다. 과거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부부 싸움 중에 부부가 차차 과거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 서로를 비판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마음속에 담아 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싫은 면을 굳이 안 보려고 하는 것과 못 본 체하는 것도 용서하는 모습이 아니다.  안 보려고 한다 해도 언젠가는 눈에 띄어 결국 참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용서인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용서하려고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예수에게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의 용서란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다 하더라도 예수는 쓸모없는 우리를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다.  용서란 예수의 전적인 자유이고, 예수의 변함없는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감정에 좌우되는 덧없고 변하기 쉬운 사랑이 아니고, 싫고 좋은 감정을 뛰어넘은 자유 의지의 결단에 의한 사랑인 것이다.  예수의 용서하는 사랑을 알수록 우리도 예수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전적으로 믿을 때 조금씩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사랑은 다음의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실현된다.  첫째로, 상대방에 대한 싫은 마음, 분노, 원한을 직접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지 직접 그 사람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말하지 않고 제삼자에게 험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험담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좋게 만들지는 몰라도, 결국은 어떠한 좋은 결과도 낳지 못한다. 험담은 용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직접 상대방엑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  직접 말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힘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편지를 통해 표현해도 좋다. 용서의 첫걸음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상대방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때 상대방을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든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진실하게 마음으로부터 서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말슴하고 싶은 것을 결코 참지 않으셨다. 바리사이파 사람이 적절하지 못한 일을 했을 때는 직접 분명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셨다.

 

   둘째로, 대화 후에는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어야 한다.  자신의 바람을 분명히 표현한 다음에, 상대방이 어떻게 할지는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상대방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이 인간을 조정할 수는 없다. 상대방의 자우에 대한 월권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랑은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은 사람들과 자신을 팔아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유를 끝까지 마음으로부터 손중하셨으며, 결코 강제로 무언가를 그들에게 강요하신 적이 없었다.

 

   셋째로, 단지 상대방에게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 나도 자유롭게 그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즉 상대방에게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나도 자유로게 그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즉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나는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아지면 사랑하고 그 사람이 싫어지면 미워하는 것은 인간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용서란 그런 좋고 나쁜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자유롭게 사랑하려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자유 의지로 상대방을 사랑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태도나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그 사람을 자유롭게 계속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용서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붙잡으려고 왔을 때 예수는 유다를 향해 "친구"(마태26, 50)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가 유다를 끝까지 친구로서 사랑하셨다는 증거이다.

 

  다시 생각해 볼 내용

  (1)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가? 용서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예수가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없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이 장에서 설명한 용서의 세 가지 단계 중에서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단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행동에 옮기고 싶은가?

 

  묵상 말씀(마태 18, 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게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저랗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결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글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을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슬 종아, 네가 애결하기에 나는 그 ㅏㅁㄶ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출처 : 제9장 용서에 관하여(1)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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