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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스크랩] 제14장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감

 

 

 

     

     영성생활의 길잡이

 

제14장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감

 

   장에서 그리스도인은 고독한 시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계속해서 이번 장에서는 그런 괴로운 현실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가에 관해 살펴보겠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인간은 대개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취하게 된다.  첫 번째 태도는 거부하거나 도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특히 추기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뚜껑을 덮으라고 하지만 아무튼 못본 체하는 것이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문제가 있을 때 아내가 집안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일에 몰두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자녀 교육에만 전념함으로써 문제를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어려움을 회피하는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들은 대부분 어떤 해결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히려 회피하거나 뚜껑을 덮어 버려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두 번째 태도는 단지 참거나 감내하거나 체념하는 것이다.  즉 지금 주어진 불행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참는 태도이다.  또는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지그시 참는 태도이다.  예를 들면 남편의 폭력을 참고 견디면서 집안일을 한다든가, 적은 월급 또는 안 좋은 상사 밑에서도 참고 일을 계속하는 태도이다.  이것은첫 번째 태도와 비교하면 훨씬 좋은 태도일 것이다.  특히 동양 사람은 서양 사람에 비하면 훨씬 참을성이 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지닌 미덕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단지 참기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우선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왜 그런 가혹한 운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노예처럼 가혹한 운명을 무조건 받아들여아먄 할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다만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가는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면 세 번째 태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그 괴로운 현실을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할 때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우려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고통의 한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다.

 

   자유로운 선택을 위한 첫걸음은 괴로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회피하지 않고 그 현실을 받아들인다.  특히 자신이 그것에 의해 얼마나 상처를 입고 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솔직하게 바라본다.

 

   둘째로 이런 상처 입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극복하고 그 괴로운 현실을 직면한다.  직면한다는 것은 그 괴로운 현실을 단순한 '문제'로 다루지 않고 '신비로운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문제'란 단지 곤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해결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은 어떻게 그 고통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뿐이지 때문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한, 문제와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것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사정은 변한다.  신비는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신비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드러나지 않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 숙고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드러나지 않은 마음을 찾고 발견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만일 그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 숙고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드러나지 않은 마음을 찾고 발견하고 받아드인다는 것이다.  만일 그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 숙고할 수 있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위안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 숙고하는 방법은 그 현실의 가혹함에 휘둘리지 않고 그 현실 속에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힘쓰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괴로운 현실도 하느님이 우리의 성장을 위해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운 현실 앞에서 '성장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운 현실 안에서 '성장을 위한 어떤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현실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보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 보물을 찾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이 단계는 당신의 자유로운 결단의 단계이다.  이 결단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결단을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자유로이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가?  이 자우로운 선택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이 선택을 하고 나서 구체적인 길을 선택하자.  만일 그것이 명백한 일이라면 그것을 없앨 수단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잠시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혹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착실하게 실행해 나간다.

 

   냉혹한 현실은 금방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주님이 주신 자유와 믿음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볼  내용

   (1)  요즈음 생활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는가? 이것에 대해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2) 그 가운데 당신 자신을 성장시키는 보물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보물인가?

   (3)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것인가?

 

   묵상 말씀92고린 6,1-10)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 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써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 냈고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 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다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후사 류이치로 지음 - 정구현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사-

 

 http://cafe.daum.net/cci2004c

 

 

출처 : 제14장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감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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