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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1편 初期의 韓國敎會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1편  初期의 韓國敎會


제 1권  天主敎의 수용(受容)

제 1장  최초의 입교자(入敎者) 이승훈(李昇薰)


1)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의 시초 ― 첫 번 入敎

① 西紀 1784년 마침내 조선(朝鮮)을 위하여 구원(救援)의 날이 밝았다. 그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천주교신앙(天主敎信仰)을 이 나라에 결정적으로 으  심으셨다. 영광스러운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는 이 때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박해(迫害)와 변천(變遷)을 겪어가면서 성장(成長)하고 견고(堅固)하여지기를 그 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 감격적(感激的)인 역사(歷史)를 서술하려고 한다.


② 하느님의 섭리(攝理)가 조선(朝鮮)에 복음(福音)을 들여보내기 위하여 사용하신 주요한 연장은, 별호를 벽(檗)이라고 하는 이덕조(李德操)였다. 그는 경주(慶州) 李氏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고려조(高麗祖) 때에 높은 벼슬을 한 그의 조상(祖上)들 중에는 학문(學問)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들과, 가장 높은 관직(官職)의 영광(榮光)을 누린 인물들이 많았다. 2-3대 전부터 이 집안은 무관직(武官職)로 전향(轉向)하였고, 그 가족들은 중요한 무관직(武官職)을 얻었다.


이벽(李檗)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훌륭한 자질(資質)을 타고 났으므로, 아버지는 나중에 그의 출세(出世)를 쉽게 만들 수 있는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어려서부터 훈련(訓練)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완강하게 거절(拒絶)하며, 죽어도 그런 것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애정(愛情)을 잃었었고, 아버지는 그의 기질(氣質)인 고집스러움을 의미하는「벽(檗)」이라는 별명을 그에게 주었다.


③ 이벽(李檗)은 자라면서 키가 크고 힘이 무척 센 사람이 되었다. 조선전기(朝鮮傳記)에는

「그는 키가 8尺이요, 한 손으로 백 斤을 들 수 있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도 모든 이의 주목(注目)을 끌었으나,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자질(資質)과 정신적 재능(才能)이 빛났으며, 그의 언변(言辯)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연구하여 파고들었으며, 경서(經書)를 배울 때에도, 어려서부터 문장(文章) 속에 숨어있는 신비(神秘)스러운 뜻을 탐구(探求)하려는 습성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④ 이벽(李檗)은 책들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학문습득(學問習得)을 지도(指導)하고 도와줄 만한 모든 학자(學者)들과 교제하였다. 그는 농담(弄談)을 좋아하였고, 조선예법(朝鮮禮法)의 복잡(複雜)하고 세밀(細密)한 규칙에 별로 구애(拘碍)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이 나라에서 직업적 학자(學者)들을 구별케 하는 어색한 점잖을 늘 빼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거지는 무엇인가 고상(高尙)하고 위대(偉大)한 기풍(氣風)을 자연적으로 풍기고 있었다. 이러한 훌륭한 소질(素質)이 그에게 이 세상에서 훌륭한 장래(를 약속(約束)하고 있었는데,  그 때 하느님께서는 인자(仁慈)로운 시선을 그에게 던지셨다.


⑤ 정유(丁酉)(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權哲身)은 정약전(丁若銓)과, 학식(學識)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많은 학자들과 함께, 방해(妨害)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李檗)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여리(百餘里)나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곤란이 그렇게도 열렬(熱烈)한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용감(勇敢)하게 걸어갔다. 그의 목적지(目的 地)까지 얼마 안남은 길을 갔을 때 밤이 되었다. 그는 밤을 새우면서 기다릴 수 가 없어서, 가던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에는 어느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과, 자기가 찾아가는 절은 그 산 뒤쪽의 산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실망(失望)은 어떠하였겠는가?  그 산은 높고 눈이 많이 쌓였으며, 호랑이 굴도 많이 있는 곳이었다. 이벽(李檗)은 중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케 하였다. 그는 맹수(猛獸)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쇠꼬챙이가  달린 몽둥이를 짚고서,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희망하던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하였다.


이벽(李檗)과 그의 일행(一行)의 도착은 산 속에 파묻힌 고적한 절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이 밤중에 이처럼 많은 손님들이 찾아들었는지 상상(想像)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구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기쁨의 상봉으로 빚어진 심정(心情)을 털어놓느라고, 미처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⑥ 연구회(硏究會)는 10여 일간 열렸다, 그동안 하늘, 세상, 인성(人性) 등 가장 주 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探求)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한 점 한 점 토의(討議)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聖賢)들의 윤리서(倫理書)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선교사(西洋宣敎師)들이 한문(漢文)으로 지은 철학(哲學), 수학(數學), 종교(宗敎)에 관한 책들을 검토(檢討)하고, 그의 깊은 뜻을 해득(解得)하기 위하여, 가능한한 온 주의(注意)를 집중시켰다. 이 책들은 조선 사절(使節)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실은 당시의 조선학자(朝鮮學者)들이      그러한 책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연례적(年例的)인 사신행차(使 臣行次)때에 조선 선비들이 따라가서 서양의 과학(科學)이나 종교(宗敎)에 대해 중국인과 대화(對話)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⑦ 그런데 그 과학서적(科學書籍) 중에는 종교(宗敎)의 초보적(初步的)인 개론(慨論)도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멸성(不滅性) 및 칠죄종(七罪宗)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德行)으로 극복(克服)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 중국서적(中國書籍)들의 어둡고 흔히는 모순(矛盾)된 학설에 익숙한 그들이지만, 정직(正直)하고 이치(理致)에 맞는 위대(偉大)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었다. 완전(完全)한 지식(知識)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不足)하였으나, 그들이 그것을 읽은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情神)을 비추기에 충분(充分)하였다.


⑧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宗敎)에 대하여, 아는 것을 전부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祈禱)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恭敬)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면서 묵상(黙想)에 전념(專念)하였으며, 또 그날에는 육肉食)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秘密)리에 실천(實踐)하였다. 그들이 얼마동안이나 이런 실천(實踐)을 계속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일련의 사실(事實)로 미루어 보아 그들 중 대부분이 그 일에 오랫동안 충실(充實)할 수는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


⑨ 이벽(李檗)의 마음속에 보배로운 씨앗이 이렇게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종교(宗敎)에 대한 이 초보적 지식(初步的知識)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의 온 정신(情神)은, 자기의 교양(敎養)을 보완(補完)하는 데 필요한, 더 많고 더 상세한 서적이 있을 북경(北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책들을 장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여러 해 동안 시험하여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失望)하지 않고, 기회(機會)가 있을 때마다 천주교교리(天主敎敎理)를 깊이 연구(硏究)하고 토론(討論)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초대(初代) 천주교인이 쓴 이야기를 보면, 그의 누이의 1주기를 기회로, 마재 丁氏 집에서 얼마동안 머무른 다음, 1783년 초여름 4월 15일에, 벽(檗)은 정약전(丁若銓), 약용(若鏞)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의 주제(主題)는 역시 그들이 늘 하고 있는 철학연구(哲學硏究)였다. 하느님의 존재(存在)와 유일성(唯一性), 천지창조(天地創造), 영혼(靈魂)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멸성(不滅惺), 후세의 상선벌악(賞嬋罰惡) 등의 문제를 차례 차례 검토(檢討)하고 해석(解釋)하였다.

승객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위로(慰勞)되는 진리(眞理)를 처음 듣고 몹시 놀라고 황홀해졌다. 이런 연구회(硏究會)가 자주 반복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자세한 내용(內容)이 어떠했는지, 우리에게 전하여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⑩ 하느님께서는 그렇게도 열성적(熱誠的)으로 진리(眞理)를 찾고 있던 이 정직한 영혼(靈魂)들의 뜨거운 소원(所願)이 실현(實現)되기를 마침내 허락(許諾)하셨다. 그해(1783년) 겨울, 이동욱(李東郁)이 북경조정(北京朝廷)에 가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아들 승훈(承薰)은 이벽(李檗)의 절친한 친구의 하나로,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으로 여행을 하게 된 것이었다.


여러 해 동안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에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게 될  이승훈(李承薰)에 대하여 여기서 몇 마디 기록해 두기로 하자.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1편 初期의 韓國敎會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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