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김범우(金範禹)사건 이후의 교회의 진전〕
① 金(범禹)토마스의 순교(殉敎)와 지도자(指導者)들의 배교(背敎)로, 이 작은 양떼의 신앙(信仰)은 잠시 동안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아주 꺼지지는 않았다. 천주교인 집단이 그 교우(敎友)들 중의 몇몇이 배교(背敎)함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겨 있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신자가 재판관(裁判官)과 형리(刑吏)들의 박해(迫害)보다도, 더 참고 견디기 어려운 집안 박해(迫害) 가운데서도 마음이 변치 않는 것으로 위로(慰勞)를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입교자(入敎者)의 수는 계속 늘어갔다.
② 權(日身)사베리오의 제자 이「단원」(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는 내포평야(內浦平野)에서 복음전파(福音傳播)를 계속하였다. 그는 위대한 재능(才能)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여 가졌으므로, 날마다 새로운 청중(聽衆)이 그에게 이끌려 왔다. 그의 전도(傳導)에 저항(抵抗)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므로, 이지방의 천주교인의 수는 현저하게 증가(增加)하였다.
신앙(信仰)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는 양반(兩班)과 선비의 집안뿐만 아니라,농부, 노동자, 서민, 가난한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받았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하여 멀리서도 떼를 지어 몰려왔고, 종종 여러 날을 머물면서 신자(信者)들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③ 이 신자들 중의 하나인 원동지(元同知)라는 사람은 너그러운 손님접대로 유명하였는데, 나중에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받았다. 그는 李(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의 청강생(聽講生)들을 많이 자기의 집에 받아들여 대접하였다. 그때부터「李「단원」(存昌)의 집에 가서는 지식(知識)을 얻고, 원동지(元憧知)의 집에 가서는 음식을 얻는다.」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④ 한편 항상 활발하게 전교사업(傳敎事業)을 하던 權(日身)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얼마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가 있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성령(聖靈)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有益)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화(聖化)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피정(避靜)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計劃)을 좀더 쉽게 실천(實踐)하기위하여, 용문산(龍門山)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들 중에는 오직 한 사람, 조동진(趙東진) 유스띠노 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하여 그들은 피정동안에는 내내 서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우리 主와 그 성인(聖人)들을 본받고자 하는 원(願)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수업(信心修業)에만 전심(專心)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진정한 천주교 실천(實천)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自身)과, 그들이 피정(避靜) 후에 가르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恩寵)을 얻게 하였음이 확실하다.
⑤ 이듬해 丁未(1787)년에는 천주교를 반대(反對)하던 소리가 차차 가라앉고, 반대의 정도도 조금 누그러져, 폭풍우(暴風雨)에 쓰러졌던 사란들 중의 많은 이가 그들의 뉘우침을 나타냈다.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하여 굴복하였던 李(承薰)베드로가 權(日身)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정약용(丁若鏞) ․ 약전(若銓) 형제를 다시 만나러 왔다. 이들은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