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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2장 첫 번 시련 ― 조선 천주교회와 北京主敎와의 관계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2장   첫 번 시련 ― 조선 천주교회와 北京主敎와의 관계


1. 첫 번째 순교자 김범우(金範禹)


「우리 주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말씀하셨다. ꡒ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  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어서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ꡓ


  하느님의 이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말씀이다. 신자(信者) 각자의 신앙(信仰)은 극기(克己)와 고통(苦痛)으로써가 아니면 뿌리를 내리고 살지 못하며, 각 민족(民族)의 신앙은 순교자(殉敎者)들의 피로 물주지 않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크게 성장(成長)하지도 못하고, 발전(發展)하지도 못한다.


  새로 생겨난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도 머지않아 이것을 체험(體驗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련(試鍊)을 우리의 연약함에 알맞게 주시는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맨 처음에는, 신입교우들을 깨우쳐 그들이 장차 무엇을 기대(期待)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시기에 넉넉하고, 그들을 낙담시키지 않을 만한 박해(迫害)의 시초(始初)만을 허락 하셨다.…」 - 본문 317쪽.


① 복음이 조선에 들어온 지 겨우 1년 후인 을사(乙巳)(1785)년 초에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恐怖)를 일으킬만한 어떤 과감한 조치(措置)로, 복음전파의 진전을 막고자 하였다. 천주교인들의 이름난 지도자(指導者)들에게는 감히 직접 손을 댈 수가 없으므로, 그는 본명을 토마스라고 하는 김범우(金範禹)를 잡아 자기 법정(法庭)에 끌어오도록 하였다.


② (金範禹) 토마스는 서울 태생으로 주요한 역관(譯官)집안 중의 하나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는 조선천주교회의 창설자(創設者)  세 사람(李承薰(베드로), 權日身(프란치스꼬), 梨檗(요한)) 중의 하나인 이벽(李檗)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1784년에 天主敎를 배운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그는 은총(恩寵)의 부르심에 즉시 응하여 열심히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였고, 자기의 온 가족 뿐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譯官)계급에서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


③ (金範禹)토마스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背敎)하라는 재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끈기 있게 배교하기를 거부하였다. 여러 가지 고문이 그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굽히지 아니 하였다. (權日身)사베리오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자기의 충실한 동교인(同敎人)을 버려두는 것이 자기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여러 교우들과 함께 판서(判書) 앞에 나아가 용감하게 외쳤다.


“우리도 모두가 金範禹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운명을 우리도 같이 하고 싶습니다.” 판서는 그렇게도 유력(有力)하고 유명(有名)한 인물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들의 말을 들은 채도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으나, (金範禹) 토마스를 박해(迫害)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④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형벌(刑罰)을 가한 뒤에도 이 천주교인의 신앙(信仰)과 끈기를 이겨낼 수 없으므로, 그를 충청도(忠淸道) 동쪽 끝에 있는 단양(丹陽)읍으로 귀양 보냈다. 귀양 간 곳에서 (金範禹)토마스는 계속하여 공공연하게 자기 종교를 신봉(信奉)하였다. 그는 큰소리로 기도문(祈禱文)을 외우고, 자기의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가르쳤다. 그의 용기(勇氣)와 인내심(忍耐心)은 잠시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상처의 악화로 단양(丹陽)에 도착한 지 몇 주후에 죽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2년 후에 죽었다고 한다. 조선(朝鮮)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첫 번째 순교자(殉敎者)의 마지막은 이러하였다.


⑤ 이 사건(事件)의 여파(餘波)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주교인들에게 복음(福音)을 입으로 고백(告白)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자기의 신앙고백을(信仰告白)자기의 피로 서명(書名)할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였다.


곧 공포심(恐怖心)이 서울과 그 부근으로 퍼져나갔다. 太學生(왕의 스승인 학자) 정숙(鄭淑)은  그때 천주교 신자(信者)들을 공격하는 맹렬한 통문(通文)을 돌려, 자기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인들과 공공연하게 절교하라」고 강요(强要)하였다. 1785년 3월에 돌린 이 문서(文書)는 천주교(天主敎)를 공식적으로 공격(攻擊)하는 첫 번째의 공문서(公文書)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집안은 자기들 가족 중에서 이 종교(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교(背敎)시키기 위하여, 달래기도 하고 협박(脅迫)과 유혹(誘惑)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그때 영광(榮光)스러운 신앙증거자(信仰證據者)들도 있었으나, 통탄(痛歎)할만한 배교자(背敎者)도 있었으니, 새로 생긴 교회의 기둥으로 보이던 사람들 중에까지도 그러하였다


⑥ 李(承薰)베드로와 이벽(李檗) 요한세자는 천주교의 주요한 우두머리요 선동자(煽動者)로 공연하게 지목(指目)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친척들 중에서 신앙(信仰)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김범우(金範禹)토마스의 형벌(刑罰)을 보고 크게 놀라, 자신들과 그 집안의 불행(不幸)을 가져오게 될 종교(宗敎)를 버리게 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다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흉악(凶惡)한 계획(計劃)은 충분히 성공(成功)하였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2장 첫 번 시련 ― 조선 천주교회와 北京主敎와의 관계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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