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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 이승훈(李承薰)의 배교

치훈(致薰)이라는 이승훈(李承薰)의 아우는 천주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맹렬한 증오심(憎惡心)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 형을 낙심시키고 뜻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다 썼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집안의 박해(迫害)로 견딜 수가 없게 된 이승훈(李承薰)은 마침내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의 종교서적을 불태우고 자기가 천주교인이었음을 일반 앞에 변명(辨明)하는 글을 썼다.


※ 이벽(李檗)의 배교

① 이벽(李檗)의 아버지는 성질이 몹시 급한 사람으로서, 새 종교(宗敎)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의 마음에서 신앙(信仰)을 빼내어버리기 위하여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이 성공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실망(失望)에 빠져, 하루는 자살(自殺)을 하려고 목에 밧줄을 감았다.


 ② 이벽(이벽)은 이런 광경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용기(勇氣)가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 그는 굴복(屈伏)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천주교인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부당한 어떤 신자(信者)가 그의 멸망(滅亡)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 이벽(李檗)을 찾아왔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계략(計略)과 모든 거짓말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시달림에 지치고, 배교자(背敎者)에게 속고, 실망(失望)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 또한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정신(精神)이 착란된 이벽(李檗)이 넘어가게 되도록 까지 하였다.


 ③ 이벽(李檗)은 명백한 배교(背敎)는 주저하여,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기의 신앙(信仰)을 감추었다. 그의 마음은 용기(勇氣)가 없어졌고, 하느님은 이미 그의 마음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지 않았으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를 버리셨다. 왜냐하면 성서(聖書)에도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씌어있는 까닭이다. 그때부터 그는 외교인(外敎人)인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 에워싸여 천주교들과는 아무런 연락(連絡)도 가질 수가 없었다. 조선전기(朝鮮傳記)에는 그가 무서운 양심(良心)의 가책(苛責)에 쫓겼다는 말이 있다.


  그는 기운이 없고 말 수가 적고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주 비통(悲痛)한 탄식(歎息)을 하는 것도 들렸다. 그는 잠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옷도 벗지 않게 되었다. 음식을 먹어도 식욕(食慾)도 없고 맛도 모르고  살로도 가지 않았다.


④ 그러나 양심(良心)의 동요(動搖)는 차츰 가라앉고, 은총(恩寵)의 마지막 노래도 거의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의 건강은 회복되었고, 벼슬을 할 욕망이 마음속에 파고들었다는 말까지 있다. 어쨌든 벼슬자리를 하나도 차지할 시간이 없었다.  丙午(1786)년 봄에, 그때 기세를 떨치던 페스트에 걸려 8일간 않은 뒤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최후(最後)가 어찌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신자들 이 그에게 가서 죄를 뉘우치라고 권고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 말은 어떤 확실한 기록(記錄)에 근거(根據)한 것은 아니다.


⑤ 그러나 그의 열성(熱性)과 위대한 자질(資質)로, 조선에 복음(福音)을 들여와 전파(傳播)하는 데 그다지도 많은 공헌(貢獻)을 한 그에게, 하느님께서 자비(慈悲)를 베푸시어 최후의 순간에 그에게 통회(痛悔)의 은총(恩寵)을 내려 주시기를 희망(希望)하자.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안타까운 배교자(背敎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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