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2) 첫 세례자 이승훈(李承薰(베드로)과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활약
① 이승훈(李承薰)은 평창(平昌) 李氏의 양반집에서 丙子(1756)년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문관(文官)으로 요직(要職)을 많이 지냈고, 그의 집은 높은 평판(評判)을 누리고 있었다. 10세 때부터 그의 조숙(早熟)한 능력(能力)이 드러났고, 20세 때에는 선비들 사이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자기 나라 성현(聖賢)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여 덕행(德行)으로 가장 이름난 인물들과 교제(交際)를 하였으며, 문학(文學)과 과학(科學)을 완성하는 것만큼 품행(品行)을 조절하는 데에도 힘썼다. 庚子(1780)년 24세 때 진사(進士)를 하였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다.
② 천진암(天眞菴) 강학회(講學會)를 통하여 맺어진 한국 초대 교회의 선구자(李檗, 權哲辛, 李承薰) 중에서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벽(李檗)은 이승훈(李承薰)이 사절단(使節團)의 일원인 아버지를 따라 北京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즉시 그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다고 문헌(文獻)은 전한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으로 참된 교리(敎理)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참 성인(聖人)들의 교리(敎理)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天主)를 공경(恭敬)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道理)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本 分)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規則)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天地創造)며 남북극(南北極)의 원리며, 천체(天體)의 규칙적 운행(運行)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天使)와 악신(惡神)들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始作)과 종말(終末)이며, 영혼(靈魂)과 육신(肉身)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天主聖子)의 강생(降生)이며, 선인(善人)은 천당(天堂)에서 상(賞)을 받고 악인(惡人)은 지옥(地獄)에서 벌(閥)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③ 종교서적을 아직 모르고 있던 이승훈(李承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감탄하면서, 그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梨檗)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이 넘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이檗)은 대답하였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상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의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이벽(李檗)의 이 말은 학문(學問)의 갈증(渴症)보다도 종교(宗敎)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救靈大事)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重大事)로 되어 갔던 것이다. 이벽(梨檗)의 이 말은 이승훈(李承薰)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그것을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所願)의 실현(實現)을 위하여 모든 노력(努力)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約束)하였다.
④ 이승훈(李承薰)은 드디어 1783년 말 경에 북경(北京)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북당성당(北堂聖堂)을 찾아가 탕(湯) 알렉산델 주교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 탕(湯) 주교는 곧 유명한 알레산델 데 고베아 주교였다. 포르투갈인이요 성프란치스꼬 수도회원으로서, 매우 박학(博學)하고 중국천주교회(中國天主敎會)가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는 중국천주교인들로 하여금 의식(儀式)에 관한 교황성좌(敎皇聖座)의 교서(敎書)를 충실히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노력한 이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조선기록에 의하면, 이승훈(李承薰)은 북경에서 나이가 90여세나 되지만 근력이 좋아 외양(外樣)이 지극히 인자한 서양사람 색덕초(索德超)를 마났고, 또 양(梁)이라는 젊은 사람도 만나보았다고 한다. 북경시내(北京市內)의 네 군데 성당(聖堂)에는 약 60 여명의 사람이 있었다.
⑤ 이승훈(李承薰)은 열심히 천주교교리(天主敎敎理)를 배우기 시작하여 미구에 성세(聖洗)를 받을 준비 가 다 되었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받았는데, 그가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洗禮名)을 받았다. 그때 북경에 있던 선교사 방따봉(de Vantavon)神父가 1784년 11월 25일자로 서양의 자기 친구에게 이 기쁜 사실을 적어 보냈다.
甲辰(1784)년 봄에 李(承薰)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서적(書籍)과 십자가상(十字架像)과 상본(像本)과 몇 가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李檗)에게 자기 보물(寶物)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벽(李檗)은 그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使臣)들의 귀국(歸國)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⑥ 이벽(李檗)은 친구가 보내 준 많은 서적(書跡)을 받자마자 외딴집을 세내어, 그 서적들을 읽고 묵상(黙想)에 전념(專念)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 이제 그는 종교의 진리(眞理)에 대한 더 많은 증거(證據)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迷信)에 대한 철저한 반박(反駁)과, 7성사(七聖事)에 대한 해설과, 교리문답(敎理問答)과 복음성서(福音聖書)의 주해(註解)와, 그날그날의 성인행적(聖人行蹟)과 기도서(祈禱棲)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종교(宗敎)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全體的)으로 또 세부적(細部的)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책을 읽어나가는데 따라서 새로운 생명(生命)이 자기의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信仰)이 커가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同胞)들에게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알려주고자 하는 욕망도 커갔다.
얼마동안 연구한 뒤에 이벽(李檗)은 자기의 은신처에서 나와,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전(鄭若銓) ․ 약용(若鏞)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는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이벽(李檗)자신은 곧 복음(福音)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중인계급(中人階級)의 친구들 중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이 뛰어난 몇 사람에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활기(活氣) 있고 박력(迫力) 있는 말을 듣고서 거의 즉시 응하였다. 그들 중에는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가 있었다. 이벽(李檗)은 여러 양반(兩班)에게도 전교하여 그들을 입교(入敎)시켰다. 그는 자기 직책에 충실하여 열성(熱性)을 늦추지 않고 도처에 복음(福音)을 전하며, 이리저리 두루 다녔다. 그의 성공(成功)은 외교인(外敎人) 학자들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반향(反響)을 일으켰고, 이 학자들은 이 새로운 교리(敎理)가 그들의 국민신앙(國民信仰)을 밑뿌리부터 뒤집어 엎는 것임을 본능적(本能的)으로 느끼고 있었다.
⑦ 그들 중 여러 학자들이, 복음(福音)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르침을 설득(說得)하여 이들을 다시 유교(儒敎)로 이끌어 들이려고 노력하였다. 맨 먼저 이 시도를 한 사람은 이가환(李家煥) 이었다. 이가환(李家煥)은 품위(品位)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그 조상(祖上)들 중에는 고명(高名)한 학자가 여럿 있었고, 이가환(李家煥) 자신도 아직 젊기는 하나 평판(評判)이 높았다. 천주교가 빨리 전파된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말하였다.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저 외국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유교는 아니다. 벽이 그것으로써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하니. 내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가서 그를 바른길로 인도하겠다.”
두 사람의 회담(會談) 날짜가 정하여지고, 두 학자의 친구들과 호사가(好事家)의 한패가 이 굉장한 토론(討論)을 참관(參觀)하려고 이벽(李璧)의집에 모였다.
⑧ 이가환(李家煥)은 먼저, 이벽(李檗)에게 그가 오류(誤謬)라고 부르는 것을 버리고 돌아오게 하려고 해보았다. 그는 승리(勝利)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主張)은 하나하나 그의 논적(論敵)인 이벽(李檗)에게 지적되고, 조목조목 반박(反駁)을 당하였다. 이벽(李檗)은 세밀한 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李家煥)의 논리(論理)의 건축(建築)을 모두 파괴(破壞)하고 먼지를 만들어버렸다. 이가환(李家煥)은 그의 논거(論據)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으나 헛일이었으니, 이벽(李檗)이 가하는 타격은 모두가 정곡(正鵠)을 찌르는 것이었다. 벽(檗)의 논리는 언제나 전후(前 後)가 일치(一致) 하여 그가 제시(提示)하고 증명(證明)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전기(朝鮮傳記)에 의하면, 벽(檗)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하여 사방에 빛을 던져주었으니, 그의 논증(論症)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환도(還刀)처럼 끊어졌다.
⑨ 이 독특한 논쟁(論爭)을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훌륭한 광경(光景)을 목도(目睹)하였다. 그것은 옛날 학파의 지도자 중의 하나요 캄캄한 중국학설(中國學說)의 한 투사(鬪士)가, 복음(福音)의 광명(光明)을 옹호하는 자와 드잡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옹호자는 진리에 의거하여 끄덕도 하지 않는데 반하여, 반대편은 그의 유연성에도 불구하고 쓰러졌으며, 다시 일어나도 또다시 쓰러지는 것이었다.
천주교의 신앙(信仰)은 이 탁월한 무대에서 멋지게 승리(勝利)하였다. 그것은 마음이 순진하고 정직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며, 새 신자(信者)들의 마음속에 그 지배력(支配力)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벽(檗)의 논적(論敵)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하기에는 하루로는 넉넉지 못하였으며, 토론(討論)은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완전히 패배(敗北)한 이가환(李家煥)은 내놓을 만한 구실이 없어졌으므로, 다음과 같은 기억(記憶)될 만한 말을 남겼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가환(李家煥)은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천주교(天主敎)에 관하여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것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⑩ 이벽(李檗)은 그가 얻은 영광(榮光)을 이용하여 새 입교자(入敎自)들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새로운 적(滴)이 또 하나 나타나, 유명해진 토론회(討論會)의 결과(結果)와 신앙(信仰)이 자꾸 전파(傳播)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편 옹호자(擁護者)들과 함께 논전(論戰)에 참가코자 하였다. 그는 가문의 높은 품위(品位)와 학식(學識)이 뛰어난 이기양(李基讓)이었다.
이벽(李檗)은 자기가 전하는 진리(眞理)에 자신(自信)이 있는지라, 그런 토론(討論)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世上)의 기원(起源)과, 우주(宇宙) 각 방면의 아름다운 질서(秩序)와, 하느님의 섭리(攝理)의 증거(證據)를 전개하였다. 그는 사람의 영혼(靈魂)의 본성과 그의 여러 가지 기능(機能) 이며, 이 세상에서의 각자의 행실(行實)과 후세의 상벌(賞罰)과의 기묘한 조화(造化)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천주교교리(天主敎敎理)의 진리(眞理)는 공격할 수 없는 원리(原理)에 의거하고 있음을 증명(證明)하였다.
이기양(李基讓)은 토론(討論)을 견뎌낼 수없어 침묵(沈黙)을 지켰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믿는 듯 하였으나, 솔직(率直)하게 그렇다고 시인(是認)할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가 물러간 뒤, 그 두 학자(學者)에 대하여 이벽(李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두 李氏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를 믿을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아무런 희망도 없다.”
⑪ 그러나 이벽(李檗)은 자기 나라에 복음(福音)을 전파(傳播)하고, 천주교회(天主敎會)를 튼튼하게 세워놓기 위하여, 학식(學識)과 평판(評判)으로 존경을 받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인물(人物)들을 몇 명 끌어들여, 그 지주(支柱)로 삼을 생각을 하였다. 이제는 위에서 말한 두 사람에게는 기대를 걸지 않고, 전에 좋은 심정을 보인 일이 있는 양근(楊根) 의 권씨(權氏) 가문으로 눈을 돌렸다.
호(號)를 녹암(鹿菴)이라고 하는 권철신(權哲身)은 저 유명한 천진암강학회(天眞菴講學會)의 주창자로서, 그때 가장 유력한 학자중의 하나이고, 그 연구회의 회장(會長)이었다. 그는 형제 중 맏이었는데, 5형제가 다 지식(知識)과 덕망(德望)으로 유명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셋째가 특출(特出)하였으니, 그는 호를 직암이라고 하는 권일신(權日身)이었다. 이 권씨 5형제는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제자(弟子)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벽(李檗)은 이 학자(學者)들을 입교(入敎)시켜, 천주교의 전파자(傳播者)와 지지자(支持者)로 심는 것이 매우 유익(有益)하리라고 생각하였다.
⑫ 같은 해 甲辰(1784)년 9월에, 이벽(李檗)은 양근(楊根) 고을 감산에 있는 權씨 집으로 갔다. 그가 도착 하자마자 종교(宗敎)에 대한 강의(講義)가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 진리(眞理)가 환하게 빛났다. 50세 쯤 된 맏이 철신(哲辛)은 중국경서(中國經書)의 철학(哲學)과 윤리(倫理)를 연구하는데 일생(一生)을 보낸 자였기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는 복음(福音)의 광명(光明)에 저항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의 명망(名望)을 높여 준 거창한 일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을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야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여 암브로시오라는 본명(本名)으로 성세(聖洗)를 받았다. 그의 항구한 신앙(信仰)과 거룩한 생애(生涯)는 이 다음 우리가 볼 것처럼, 그에게 훌륭한 화관(花冠)을 장만하여 주었다.
셋째 권일신(權日身)은 즉시 입교(入敎)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의 비상한 열심과 격식을 갖춘 열성(熱性)은, 이벽(李檗)의 희망(希望)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증명(證明)하였다. 그는 자기가 신봉(信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족 전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자기 친구(親舊)와 친지(親知)들에게 신앙(信仰)을 전파(傳播)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 성공(成功)은 그의 명성(名聲), 학식(學識), 덕행(德行)의 권위(權威)로 확보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노력을 크게 축복(祝福)하시어, 양근(楊槿) 고을이 당연히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搖籃)으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⑬ 그 무렵 북경에서 영세(領洗)한 (李昇薰)베드로 가 이 성사(聖事)를 이벽(李檗)과 권일신(權日身)에게 주었다. 본명(本名) 선택은 되는대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벽(李檗)은 조선의 개종사업(改宗事業)을 시작하여 구세주(救世主)가 오시는 길을 준비(準備)하였으므로 본명을 요한 세자(洗者)라 하였고, 권일신(權日身)은 복음전파(福音傳播)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東洋)의 사도(使徒) 프람치스꼬 사베리오 성인(聖人)을 주보(主保)로 하여 그를 모범(模範)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保護者)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제부터 본 글에서는 이들을 이 본명(本名)으로 부르기로 한다.
⑭ 이 세 사람, 즉 (李昇薰)베드로와 (李檗)요한세자와 (權日身)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자기들이 개척(開拓)한 고상한 길로 보조(步調)를 일치하여 나아가면서, 모든 기회(機會)를 이용하여 동포(同胞)(들의 눈에 신앙(信仰)의 광명(光明)을 비추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때까지는 복음(福音)의 전파(傳播)가 공공연하게 별 지장(支障) 없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벌써 진리(眞理)의 전파(傳播)가 투쟁(鬪爭) 없이는 되지 않을 것임을 쉽게 예측(豫測)할 수 있었으니, 여기저기에서 반대(反對)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정부(朝鮮政府)와 백성(百姓)의 잘 알려진 편견(偏見)은 다가올 폭력행위(暴力行爲)를 염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念慮)와 우려(憂慮)의 예측도 우리의 세 전도자(傳導者)의 용기(勇氣)를 꺾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신앙은 크게 전파(傳播)되어 나갔다. 특히 (權日身) 사베리오는 직접적(直接的)으로도 그렇고, 또는 제자(弟子)들을 통하여서도 놀랄만한 성과(成果)를 거두었다. 전교(傳敎)는 수도(首都)와 그 인접(隣接)지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구에 생명(生命)의 말씀이 조선(朝鮮)의 지방(地方) 곳곳에 전하여졌다.
⑮ 그때 權(日身) 프라치스고 사베리오의 집에는 존창(存昌)이라고 부르는 李단원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넓고 기름진 내포평야(內浦平野)의 접경에 잇는 忠淸道 天安郡 여사울 양민(良民)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非常)하여,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더 완전(完全)하게 배우고 싶은 욕망(慾望)으로 인하여, 어떤 유력(有力)한 선생(先生)을 찾아가 배우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때 權氏 집안 학자(學者)들의 평판(評判)은 한창 높았었고,「단원」(存昌)은 그들을 찾아가 제자(弟子)가 되었다. 權(日身)사베리오는 자기의 새 제자(弟子)의 좋은 자질(資質)과 훌륭한 품성(品性)에 매혹되어 있었다. 權(日身)사베리오는 이미 얼마 전부터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에,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는 행복(幸福)을 얻었다. 權(日身)사베리오는 이내 천주교(天主敎)를 그에게 알려주었고, 믿어야 할 신조(信條)뿐만 아니라, 특히 천주교인의 본분(本分)과 그 실천방법(實踐方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온갖 희망(希望)을 초과하는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李단원(存昌)은 루도비꼬 곤자기라는 본명(本名)으로 성세(聖洗)를 받고, 자기 스승으로부터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신도 전교(傳敎)하라는 사명(使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家族)과 친척(親戚)과 친구(親舊), 그리고 그의 지식(知識)과 덕행(德行)의 평판(評判)에 이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入敎)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천주교회(內浦天主敎會)의 기초(基礎)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내포(內浦)는 늘 열심(熱心)한 천주교인(天主敎人)의 못자리가 되어왔다.
조선 남쪽에 있는 전라도(全羅道)의 천주교회(天主敎會)를 튼튼한 기초위에 세운 영광(榮光)도 權(日身)사베리오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것은 유항검(柳恒儉)을 입교(入敎)시킴으로써 이룩한 것이었다.
유항검(柳恒儉)은 아우구스티노라는 본명(本名)으로 영세(領洗)하였다. (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그리 높지 않은 양반계급(兩班階級)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덕망(德望)과 많은 재산(財産)으로 인하여 세력이 컸다. 그는 전주(全州) 고을 초남(草南)에 살고 있었는데, 새로운 종교(宗敎)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그 교(敎)를 신봉(信奉)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평판(評判)에 끌려, 자신(自身)이 직접 연구(硏究)해 보려고 權氏 집안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천주교의 교리(敎理)를 알자마자 그의 정직한 마음은 곧바로 승복(承服)하였고, 즉시 실천(實踐)하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 곧바로 자기의 많은 가족(家族)들을 가르쳤고, 또 자기의 친구(親舊)들과 이웃사람들과 아는 사람들에게도 이 좋은 소식(消息)을 전하였다. 그의 열심과 열성(熱性)과 항구한 마음은, 그를 남쪽지방 천주교회의 모퉁이돌로 인정(認定)받을 수 있게 하여준다. 거의 같은 시기(時期)에 역시 전라도(全羅道)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持忠)바오로란 사람도 김범우(金範禹)를 통하여 신앙(信仰)을 받았는데, 김범우(金範禹)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지방에서 복음전파(福音傳播)에 공헌(貢獻)을 많이 한 사람으로는 정씨가문(丁氏家門)을 들어야 한다. 오래전부터 유명한 이 나주(羅州) 정씨(丁氏) 집안은 그때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 고을 마재(馬峴)에 살고 있었는데, 이벽(李璧)의 첫 번 대화에서 참석했던 정약전(丁葯錢) 약용(若鏞) 형제는 바로 이 집안사람들이었다. 丁氏 두 형제(兄弟)는 당시 공직(公職)에 있었다. 그들은 둘이 다 (李承薰)베드로에게서 배워 영세(領洗)를 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에 종교운동(宗敎運動)을 놀라울 만큼 도운 또 다른 훌륭한 사람들 이 집안에는 많이 있었다. 또한 낙민(樂敏)이라고 불리는 홍(洪)루까의 양반 집안도 들어야 한다.
처음부터 가장 전교(傳敎)에 힘을 쓴 중인계급(中人階級)의 인물들은 崔(인吉)마티아, 池(洪)사바, 崔요한이었다. 崔(仁吉) 마디아는 역관(譯官) 집안의 아들로서, 이벽(李檗)에게서 교리(敎理)를 배웠다. 池(洪)사바는 궁중(宮中) 약사(藥師) 집안의 아들로서, 자원(自願)하여 나와서 교리(敎理)를 배웠다. 본성(本性)이 순직(順直)하고 온공(溫恭)하고 부지런하여, 천주교를 잘 연구한 뒤로는 열심히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전념(專念)하였고,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이 소원(所願)이었다. 그래서 위협(威脅), 궁핍(窮乏), 고통(苦痛) 등에 기꺼이 몸을 내놓았다. 관천(冠泉)이라는 호로 알려진 창현(昌顯)이라고 부리는 崔요한도 역관(譯官)집안의 아들로서 활동적(活動的)이고 정력적(精力的)인 인물이었다. 천주교에 나온 후로는 모든 교회서적(敎會書籍)들을 자기 손으로 베껴, 그것으로 크게 봉사(奉事)를 하였다. 그의 책 베끼는 솜씨가 어찌나 평판(評判)이 높던지, 책을 가지고 싶은 교우(敎友)들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그를 찾아갈 정도였다. 「주일(主日)과 축일(祝日) 성경의 해석」이라는 한문책을 조선말로 번역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천주교 교리(天主敎敎理)가 이렇게 빨리 전파(傳播)된 것을 제대로 이해(理解)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 사회의 일상적 관계(日常的關係)를 이해하여야 한다. 양반과 부잣집에서는 여자(女子)들이 있는 방은 안쪽에 완전히 떨어져 있으므로, 자연히 남자(男子)들의 교제(交際)는 더 자유롭고 더 빈번하여지기만 한다. 주인(主人)이 일상 거처(居處)하는 각 가옥의 앞채는 응접실(應接室)과 같아서, 친구나 나그네나,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모두 언제나 들어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말참견을 할 수가 있다.
조선(朝鮮) 사람들은 천성(天性)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지라, 줄곧 큰길과 작은 길을 돌아다닌다. 자기 집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사랑방 저 사랑방으로 새로운 소식(消息)을 찾아다닌다. 정치(政治)에는 관심(關心)이 없거나 적으므로 그들은 학문(學問)이나 문예(文藝)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각기 연구(硏究)한 결과(結果)를 서로 발표하고, 문학작품(文學作品) 같은 것을 서로 비교(比較)하기도 한다. 그다지도 이상하며, 그렇게도 새로우며, 그렇게도 이름이 높은 학자(學者)들에 의하여 전파(傳播)된 천주교(天主敎)가, 얼마나 일반인의 호기심(好奇心)을 자극(刺戟)하였으며, 그것이 조선에 나타남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고 들었는지 쉽게 상상(想像)할 수가 있을 것이다.
위에서 그 이름을 言及한 사람들 외에도, 다른 많은 신입교우(新入校友)들이 그때 자기들이 받은 광명(光明)을, 동포(同胞)들의 눈에 비추어주려고 활동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모두 여기에서 소개(紹介)하지는 못하고, 다만 가장 유명(有名)하여 그 이름이 본 서에 반복(反復)해서 자주 나오는 인물(人物)들만 소개(紹介)가 될 것이다. ― 본문 상권 316쪽―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