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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의 시행과 북경주교의 금지명령〕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의 시행과 북경주교의 금지명령〕


① 이 무렵 복음(福音)의 전파(傳播)를 더욱 쉽게 하고 신입교우들의 신앙(信仰)을 굳게 하기 위하여, 權(溢辛)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李(承訓) 베드로, 정약용(丁若鏞) ․ 약전(若銓) 형제 및 다른 유력한 신자들이 자기들끼리 교계제도(교계제도) 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런 생각이 아무리 괴상해 보이더라도 아주 자연스러울 것이기는 하였다. 그들의 본보기가 된 中國의 천주교인(天主敎人)들처럼, 서양(西洋)에서 온 목자(牧者)들을 가지는 행복(幸福)을 누리지 못한 조선(朝鮮)의 천주교인들은, 한 교회(敎會)가 지도자(指導者)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제직(司祭職)의 본질을 모르고, 또 그것이 대사제(大司祭)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지 않는 계통(系統)으로 전승(傳承)되어 옴을 모르는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主敎)와 신부(神父)를 내는 것보다 더 잘하는 일은 없다고 믿었었다.


② 李(承薰) 베드로는 북경에서 주교(主敎), 신부(神父), 그 밑의 성직자(聖職者)들로 된 가톨릭의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실지로 적용(適用)되는 것을 보았었다. 그는 도시의 성당에서 미사성제(聖祭)에도 참여했고, 그가 있는 데에서 성사(聖事)가 거행되는 것도 보았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기억(記憶)을 되살렸고, 그들은 신자용 예절서(禮節書)나 교리서(敎理書)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빌어 완전한 조직 계통(組織系統)을 세우고, 곧 목자(牧子)들의 선정에 들어갔다.


그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가장 뛰어난 權(溢辛)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주교(主敎)로 지명되었고, 李(承薰)베드로, 이「단원(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 柳(恒儉)아우구스띠노, 崔(昌顯)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神父)로 선출되었다. 주교성성식(主敎成聖式)이나 사제서품식(司祭敍品式) 비슷한 어떤 의식(儀式)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임지(任地)로 직행하여, 미사성제를 드리고, 신자(信者)들에게 성체(聖體)를 영하여 주는 등 일종의 신자행정(信者行政)을 시작하였다.


③ 그 당시의 기록(記錄)에는 이 성사(聖事)들에 대하여만 말이 있다. 이 목자(牧者)들이 준 영세(領洗)는 확실히 유효(有效)하여 재생(再生)의 은총(恩寵)을 주었다. 그들이 준 다른 성사(聖事)는 무효(無效)였음도 물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의 성직수행(聖職遂行)이 도처에 열심을 촉진하고, 전국에 신앙(信仰)을 전파(傳播)함에 새로운 충동(衝動)을 주었음은 확실하다. 그때 천주교인들이 열광적(熱狂的)이었다는 것과 예절(禮節)에 참여하고 성사(聖事)를 받는 데에 거룩한 열성(熱性)을 가졌었다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처음 방인사제(邦人司祭)요, 유명한 순교자(殉敎者)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할머니는, 자기에게 영세(領洗)를 준 자기의 삼촌 이「단원(존창) 곤자기의 루도비꼬는 미사를 드릴 때 금잔(金盞)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④ 제의(祭衣)는 화려한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었는데, 그 모양은 우리의 제의(祭衣) 같지가 않고, 조선 사람들이 제사(祭祀)를 지낼 때 입는 옷과 비슷한 것이었다. 신부(神父)들은 중국에서 가톨릭 예식(禮式)을 집행할 때에 쓰는 관(冠)을 썻고, 신자(信者)들의 고백(告白)을 들을 때 그들은 단(壇)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았으며, 고백(告白)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보통 보속(補贖)은 희사(喜捨)였고, 더 중한 죄(罪)에 대하여는 신부(神符)가 직접 회초리로 죄인(罪人)의 종아리를 때렸다.


조선(朝鮮)의 예법(禮法)에 따라, 지체 높은 부인(婦人)들을 보는 것을 피해버릇한 신부(神父)들은, 처음에는 그런 부인(婦人)들의 고백(告白)을 듣기를 거절(拒絶)하였다. 그러나 하도 간절히 졸랐기 때문에 결국 동의(同議)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神父)들이 천주교인들을 방문(訪問)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성사(聖事)를 청하였다. 그들은 걸어서 다녔으며, 언제나 허영(虛榮)과 교만(驕慢)을 피하도록 서로 격려하였다.


⑤ 서울에서는 최관천(崔貫泉) 요한이 집 한 채를 세내어 성사(聖事)를 거행케 하였다. 그는 매우 활동적(活動的)이고 몹시 총명(聰明)하여, 신부(神父)를 영접하고 교우(敎友)들을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귀찮음과 피곤함도 꺼리지 않고, 밤낮으로 이 직분(職分)에만 몰두(沒頭)하였다. 그는 교회의 총회장(總會長) 격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천주교를 신봉(信奉)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집에서 행해지는 집회(集會)를 반대하기는커녕, 도리어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두호(斗護)하였다.


⑥ 임기응변(臨機應辯)의 이 조선 성직자(聖職者)들은 많은 성과(成果)를 거두며, 또 완전한 선의(善意)로, 거의 2년 동안 이렇게 그 직책(職責)을 수행(遂行)하였다. 그러나 己酉(1789)년에, 교회서적(敎誨書籍)의 어떤 구절(句節)을 더욱 자세히 연구한 결과, 주교(主敎)와 신부들(神符)들의 머리 속에는 자기들의 선출(選出)과 성직수행(聖職遂行)을 경솔한 처사로 생각하여, 즉시 중지(中止)해야 한다는 결론(結論)을 내렸다. 그리고 그 문제(問題)에 대하여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문의(問議)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의(決議)하였다(특히 유항검(柳恒儉)이 자기들의 행위가 독성죄(瀆聖罪)라는 것을 발견, 이승훈(李昇訓)에게 편지를 보냄).


모든 신자(信者)들 앞에서 그런 직위(職位)에 올랐다가,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염려가 있는데도, 즉시 그 직위(職位)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그들의 신앙(信仰)은 진실(眞實)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거룩한 것을 모독(冒瀆)할 위험(危險)을 당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즉시 평신도(平信徒)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때부터는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을 가르치고, 외교인(外敎人)들에게 신앙(信仰)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專心)하였다.   


⑦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문의(問議)하는 편지(便紙)는 李(承薰)베드로와 權(일신)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썼고, 그것을 확실히 전달(전달)할 방도(방도)를 모색하던 차, 연례(年例)의 사신행차(使臣行次)가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비밀(秘密)이어야 하는 이 연락(連絡)을 중국천주교회와 취해야 하는, 위험한 사명(使命)을 맡고자 할 유능(有能)하고 헌신적(獻身的)인 인물을찾아내야만 하였다. 사신(使臣)의 일행에는 천주교신자가 없었으므로, 외교인(外敎人)들 모르게 신자(信者)를 한 사람 그 일행 속에 들여보내도록 해야만 하였다.


이 중요한 사명(使命)을 위하여 예비신자 윤유일(尹有一)바오로에게 눈을 돌렸다. 尹(有一) 바오로는 여주(驪洲)지방의 양반집 후손으로 권씨(權氏) 집의 제자였고,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그에게 교리(敎理)를 가르쳤었다. 그의 성격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비밀을 잘 지킴으로, 계획(計劃)된 이 사업(事業)의 적임자(適任者)였다. 그는 그에게 맡기는 사명(使命)을 수락하여, 주교(主敎)께 드리는 편지(便紙)를 지니고, 장사꾼으로 변장(變裝)하여 1789년 그해 10월에 북경(北京)을 향하여 떠났다.


⑧ 서울에서 北京까지는 5천리 길이다. 겨울동안에 외국 땅에서 하는 이 긴 여행(旅行)은 매우 고생스럽고, 진정한 위험(危險)을 동반한다. 사신일행(使臣一行)중의 여러 사람이 도중에 병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념(專念)하고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기만 하여서, 아무런 여행(旅行)에 대한 경험(經驗)도 없고 또 모르는 동행들 가운데서, 인간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외로운 존재로 있는 尹(有一)바오로에게는 보통의 피로(疲勞)도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일행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것처럼 가장(假裝)한 尹(有一)바오로서는, 그들과 똑같이 행동(行動)하면서, 그들과 함께 걸어서 길을 가야만 하였다.

⑨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전능(全能)한 은총(恩寵)으로 지탱되던 尹(有一)바오로는 마침내 北京에 도착하였다. 그는 곧 주교(主敎)를 찾아가 자기가 가져온 편지(便紙)를 전해드리고, 조선(朝鮮)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事件)과, 새로 태어나는 천주교인(天主敎人) 집단의 기쁨과 고민(苦悶)을 상세하게 말씀드렸다.


뜻하지 않은 尹(有一)바오로의 북경도착은 북경교회(北京敎會)에 큰 기쁨을 주었다. 그 어떤 신부(神父)도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傳播)한 일이 없는 나라에서 와서, 그 나라에 신앙(信仰)이 얼마나 기묘(奇妙)하게 보급(普及)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 천주교인의 존재는 선교사(宣敎師)들과 특히 구베아(Gouvea)주교에게 너무나 즐거운 광경(光景)이었다.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이 새로운 양들에게 서둘러 사목교서(司牧敎書)를 썼다.


⑩ 경술(庚戌)(1790)년 봄에 尹(有一)바오로는 사신행차(使臣行次)를 따라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북경에서 영세(領洗)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았다. 이 천상(天上)의 도움으로 힘을 얻은 그는 모든 어려운 고비를 교묘(巧妙)하게 벗어날 수가 있었고, 의심(疑心)을 받지 않고 국경(國境)을 넘어 아무런 곤란한 문제도 당하지 않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주교의 회답은 尹(有一)바오로가 그것을 옷 속에 쉽게 감춰서 더 확실하고 더 쉽게 조선에 들여올 수 있도록 명주 조각에 쓰였었다. 편지(便紙)를 받을 사람은 李(承薰) 베드로와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로 되어 있었다.


⑪ 주교는 우선, 신앙(信仰)에 불러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恩惠)에 대하여 지극히 착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천주(天主)께 불멸의 감사(感謝)를 드리라고 신입교우들을 권면(勸勉)하였다. 그는 또한 복음(福音)의 은총(恩寵)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을 쓸 것과, 항구(抗久)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였다. 믿을 교리(敎理)와 천주교윤리(天主敎倫理)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李(承薰) 베드로와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함부로 사제성직(司祭聖職)에 개입한 데 대한 책망이 있었다.


주교는 그들이 성품성사(聖品聖事)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성제를 절대로 거행할 수 없고, 영세(領洗)를 제외한 성사(聖事)를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激勵)하며, 미신자(未信者)들을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단히 기쁜 일을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런 행동을 꾸준히 계속하라고 격려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이 답장(答狀)은 이제는 아무런 의심(疑心)도 남겨놓지 않았다. 이 편지(便紙)는 완전히 복종(服從)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졌고, 각자는 성직수행(聖職遂行)을 중단하는 슬기를 가졌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⑫ 그러나 조선교우(朝鮮敎友)들은 성사(聖事)를 받고픈 마음이 간절하였다. 尹(有一) 바오로가 北京에서 본 성당(聖堂)이며, 복음을 전하러 이 땅의 극변(極邊)에서 온 서양선교사(西洋宣敎師)들이며, 그들과 가졌던 대화(對話)와 그가 받은 성사(聖事)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이야기로 흥분한 신자(信者)들은,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새로운 편지를 보내어, 전도(傳導)로써 그들을 가르치고 성사(聖事)의 거행으로 그들을 힘 있게 해 줄 수 있는 신부(神父)들을 보내달라고 간청(懇請)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기회는 좋았었다. 1790년 9월(양력)에 80회 탄신을 맞는 건륭황제(乾隆皇帝)를 축하하기 위하여 별사(別使) 일행이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尹(유一)바오로는 다시 중국길을 떠났다. 이 두 번째 여행에는 우(禹)라는 예비신자가동반(同伴)하였는데, 이 사람은 조선 王의 관리(官吏)로서, 왕의 명령을 받아 北京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사오기로 되어 있었다. 사자(使者)는 사고 없이 도착하여 동포(同胞)들의 편지를 주교에게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목자(牧者)를 얻기 위한 신입교우들의 간청(懇請) 외에, 자기들 나라의 계약관계(契約關係)와 미신(迷信)과 조상숭배(祖上崇拜)와 그 밖의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質問)도 들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주교(主敎)는 학식(學識)있고 열성(熱性)있는 선교사(宣敎師)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答辯)을 하고그들에게 신부(神符)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신부(神父)의입국(入國)을 준비하고 도울 수 있도록,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그 신부(神父)가 국경(國境)에 나타날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예비신자 우(禹)는 성세(聖洗)를 받고 본명(本名)을 요한세자라고 하였다. 그는 성작(聖爵) 한 개, 미사경본 한 권, 성석(聖石) 한 개, 제의 등 미사성제 거행(擧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다. 그는 또 선교사(宣敎師)가 도착할 때, 모든 준비(準備)가 갖춰져 있도록 하기 위하여, 포도로 술 만드는 법도 배웠다.


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와 우(禹) 요한세자는 10월(양력)에 북경(北京)을 다시 떠났다. 그들은 무사히 자기들 나라로 돌아와서, 주교(主敎)의 편지(便紙)와 그들이 맡아가지고 온 물건(物件)들을 전하였다. 새로 나는 교회(敎會)는 머지않아 신부(神父)를 가지게 된다는 희망(希望)으로 기뻐 용약(勇躍)하였다. 그러나 미신(迷信)과 조상숭배(祖上崇拜)에 대한 결정(決定)은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 걸려 넘어지는 돌과 배교(背敎)의 원인(原因)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이들은 자기들이 아는 천주교 규칙(規則)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세상을 떠난 부모(父母)에게 드리는 미신적(迷信的)인 숭배(崇拜)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무지(無知)와 선의(善意)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용서(容恕)받을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그와 같은 일, 즉 제사(祭祀), 의식(儀式), 예배(禮拜)등에 참여(參與)하는 것은 일체 불가능(不可能)하게 되었다. 교회는 북경주교(北京主敎)의 입을 통하여 조상숭배(祖上崇拜)는 하느님숭배에 반대(反對)되는 것임을 선언(宣言)한 것이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이 선언(宣言)은 조선국민(朝鮮國民)의 모든 계급의 눈동자를 찌른 셈이었다. 왜냐하면 조선(朝鮮)에서는 유교(儒敎) 즉 조상숭배(祖上崇拜)가 바로 국교(國敎)였던 까닭이었다. 이 숭배(崇拜)를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은 전국의 여론에 의하여 맹렬(猛烈)한 반발(反撥)을 불러일으키며, 필요한 예절(禮節)을 궐(厥)하는 것은 엄한 벌(閥)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 기원(起源)이 매우 오래되었고, 대대로 충실(充實)히 전해 내려오는 이 전통적(傳統的) 관습(慣習)은, 모든 사람의 눈에, 사회의 기초(基礎)가 되고 국가의 기틀이 되며, 모든 자연관계의 거점(據點)으로 비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감히 말로라도 공격하다가는 큰 일이 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머지않아 일어날 폭풍우(暴風雨)와 천주교인들의 적들이 이제 막 싹트는 교회를 파괴(破壞)하고 말살(抹殺)하기위하여, 신자(信者)들의 행동(行動)에서 끄집어 낼 방침(方針)을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다.


⑭ 몇몇 마음약한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날로부터 천주교를 신봉(信奉)하는 것을 그쳤다. 그들 중에는, 이미 두려움으로 몇 해 전에도 그렇게 통탄스럽게 넘어 갔던 李(承薰)베드로가 끼어 있음을 우리는 마음 아파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벼슬에 대한 야심(野心)에 이끌려, 차례차례로 여러 가지 공직(公職)을 얻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 나라에서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미신적(迷信的)인 의식(儀式)에 참여하게 된다.


그 후로는 그의 배교(배敎)에도 불구하고 외교인(外敎人)들에게까지도 멸시(蔑視)를 당하며, 외교인들의 눈에 천주교(天主敎)를 들여온 罪를 완전히 씻기에 이르지 못하는 그를 드문드문 보게 될 것이다. 천주교를 들여온 것은 외교인(外敎人)들의 눈으로 볼 때 일종의 원죄(原罪)와 같은 것이어서, 그들은 이것을 오늘까지도 그의 후손(後孫)에게 비난(非難)하고 있는 형편이다.


李(承薰)베드로의 두 번째 배교(背敎)에도 불구하고, 신입교우들의 신앙(信仰)은 크게 흔들린 것 같지는 않으며, 대다수는 마음과 정신으로 교회(敎會)의 결정(決定)에 복종(服從)하여 열심히 실천(實踐)하기를 계속하였고, 모든 미신행위(迷信行爲)를 끊어버렸다.


⑮ 천주교의 창설자(創設者) 세 사람 중에서 오직 홀로 남은 權(日身) 사베리오는 작은 양떼를 견고(堅固)하게 지도(指導)하고, 그 수를 늘리기에 열성(熱性)을 배가하였다. 그가 이 일을 해나가는 동안, 당시 30여세 된 관천이라는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훌륭한 도움을 받았다. 한편 내포지방(內浦地方)에 있는 李(存昌) 곤자기의 루도빅꼬와, 전라도(全羅道)에 있는 柳(抗儉)아우구스띠노는 용기(勇氣)를 잃지 않고 계속하여 복음(복音)의 진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해(1790년)에 최필공(崔必恭)의 입교가 있었는데, 그는 영세(領洗) 때에  토마스라는 본명(本名)을 받았다. 崔(必恭) 토마스는 서울의 중인계급(中人階級)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祖上)들은 정부에 의관(醫官)으로 봉직(奉職)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최필공(崔泌恭)은 공직을 얻는 데에 아무런 후원자(後援者)도 없었으므로 공직을 얻지 못하여 몹시 가난하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가난하여 결혼(結婚)도 하지 못하였다. 솔직함과 너그러움이 그의성격의 본바탕이었으므로, 그는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이내 입교(入敎)하였다. 입교하는 날부터 그는 크나큰 열성(熱性)을 보여, 영신(靈神)의일만 생각하고, 육신(肉身)의 일은 필요한 것을 돌보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 거룩한 열광(熱狂)은 때가 지나도 식지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는 천주교(天主敎)를 공공연하게 전도(傳導)하기를 그치지않았다. 그는 어떤 때에는 한 길 가운데 군중(群衆) 속에 멈추어 서서, “천지의 대왕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 하고 외치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새로 들어온 신자(信者)이기는 하지만, 이내 어디서나 가장 열심한 신자(信者)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이 입교(入敎)와 또 불행이도 상세한 내용(內容)을 알 수 없는 여러 다른 사람의 입교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용기(勇氣)를 다시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박해(迫害)에 대하여, 그들을 튼튼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의 시행과 북경주교의 금지명령〕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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