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2권 주문모(周文謨) 神父의 활동과 신유박해(辛酉迫害)
<周(文謨) 신부의 입국으로부터 그의 영광스런 殉敎까지(1794~1801년)>
제 1장 주문모(周文謨) 神父의 입국
1.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
① 우리는 1790년에 북경 주교(主敎)가 조선 교회의 대표 尹(有一) 바오로와 우(禹) 요한 세자에게 머지않아 목자(牧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約束)하였음을 보았다.(P. 23쪽 참조)그는 약속을 지켰으니, 마카오의 재속신부(在俗神父)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가 선교사(宣敎師)로 임명(任命)되어 북경(北京)에서 출발하였다.
② 해마다 조선의 사신(使臣) 일행이 귀국(歸國)할 때에는 중국과 조선 국경(國境)에 장이 서고, 두 나라의 많은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러 그리로 모여든다. 신부(神父)가 그해 이 장에 가기로 조선교우(朝鮮敎友) 대표들과 약속(約束)이 되어 있었다. 알아볼만한 어떤 표(標)를 단 조선의 교우들도 그리로 가서, 그를 맞아 자기들 나라로 인도(引導)하기로 되어 있었다.
③ 20일 동안을 걸은 뒤에 레메디오스(Remedios)는 조선 국경(國境)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그때 그렇게도 심하던 박해(迫害)에 막혀 나타나지 못하였다(실은 조선 교우는 국경에 나타났었으나 吳神父가 미처 책문(柵門) 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열흘이나 지나서 장은 걷히고, 사신(使臣) 일행은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 열성(熱性) 있는 선교사(宣敎師)는 자기의 계획(計劃)이 실패(失敗)하였음을 몹시 가슴아파하며 그와 동행(同行)하였던 중국인들과 같이 북경(北京)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④ 레메디오스(Remedios) 신부(神父)를 조선(朝鮮)으로 보내고 나서, 구베아(Gouvea)주교는 교황(敎皇) 비오 6세에게 글을 올려, 이 나라에 천주교회가 신기(神奇)하게 세워졌다는 소식(消息)을 알려 드렸다. 그의 편지는 1792년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때 교황(敎皇)은 크나큰 근심에 잠겨있었으며(프랑스 혁명의 와중), 그 무서운 시대(時代)의 고뇌(苦惱) 중에서 그는 동양(東洋)의 극변(極邊)에 로마 성교회(聖敎會)의 새 자녀들이 생겼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까지 그의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았던 한 나라에서 벌써 증거자(證據者)들을 가지셨다는 소식(消息)을 들은 것이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새로 태어난 그 교회에 충심(忠心)으로 첫 번 축복(祝福)을 보냈다.
안또넬리(Antonelli) 추기경(樞機卿)은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다음과 같은 회답(回答)을 보냈다.
“우리의 훌륭한 교황께서는 귀하가 그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에 대하여 적어 보내신 이야기를 지극히 열심히 읽으시고, 대단히 기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지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첫 수확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음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셨습니다.”
또 이런 말도 덧붙였다.
“교황성하(敎皇聖下)께서는 저 새로운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의 저 훌륭한 투사(鬪士)들을 지극한 어버이의 애정으로 사랑하십니다. 성하(聖下)께서는 저들에게 온갖 영신적(靈神的) 은혜(恩惠)를 내려 주시며, 비록 육체로는 멀리 떨어져 계시나, 마음의 눈으로 저들을 보시며 다정하게 껴안으시며, 충심(忠心)으로 저들에게 교황강복(敎皇降福)을 주십니다.”
끝으로 추기경(樞機卿)은 온 천주교회의 목자(牧者)이신 교황(敎皇)께서 북경교회의 딸인 저 새로운 교회(敎會)를 그의 보살핌과 지도에 맡긴다는 것을 북경주교(主敎)에게 통고하였다.
⑤ 레메디오스(Remedios) 신부(神父)가 돌아온 뒤에 주교는 꼬박 3일 동안 조선(朝鮮)에서 아무런 소식(消息)도 받지 못했다. 이렇게 오랜 침묵은 불길(不吉)한 징조였다. 하기는 1792년에 사신행차(使臣行次)를 따라왔던 몇몇 사람들로부터 몇마디의 말을 들은 주교(主敎)는 천주교인들이 박해(迫害)를 받는다는 의심(疑心)을 품고, 어째서 그들 중의 누구도 신부(神父)를 맞아들이러 약속(約束)장소에 오지 않았는지를 깨닫게 되었었다.
1년 후 尹(有一) 바오로와 池(璜) 사바가 온 뒤에야 주교(主敎)는 이 첫 번 박해(迫害)의 자세한 내용(內容)을 알게 되었다. 슬픔에 잠긴 이 교회(敎會)를 어떻게 해서든지, 또 할 수 있는 한 빨리 구원(救援)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명백(明白)하였다. 주교는 이것을 잘 깨닫고 신부(神父)를 그들 나라에 들여보낼 방도(方途)를 이내 밀사(密使)들과 협의하였다.
⑥ 첫 번 선교사로 임명되었던 레메디오스(Remedios) 신부(神父)는 세상을 떠났었다. 그 대신으로 주교(主敎)는 북경교구신학교(北京敎區神學校)의 첫 번 수확(收穫)인 젊은 중국인(中國人) 신부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강남성(江南省)의 큰 도시 소주(蘇州)사람 周(文謨) 야고보였다. 포루투갈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야고보 벨로조(Vellozo)신부라고 불렀다. 그는 그때 나이 42세였으나, 그의 신심(信心)이 대단하고 중국문학(中國文學)과 교회지식(敎會知識)에 능하며, 얼굴모습이 조선(朝鮮) 사람들의 얼굴과 꽤 비슷하였으므로, 북경 주교(主敎)는 이 아름답고 위험(危險)한 전교지역(傳敎地域)을 위하여 그를 택하게 되었다.
⑦ 周(文謨)야고보 신부는 사도직(使徒職) 수행을 위한 일반적(일반적)인 권한과 비상권한(非常權限)을 모두 받아가지고 1794년 2월(양력) 에 북경(北京)을 떠났다. 20일 동안을 걸은 뒤 그는 조선국경(朝鮮國境)에 다다랐다. 천주교(天主敎人)인들이 그를 맞아들여, 서울까지 인도(引導)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박해(迫害)동안에 내려진 명령(命令)으로 인하여 감시(監視)가 매우 엄중하였으므로 그 시도(試圖)를 12월까지 연기(延期)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정해진 기일을 기다리는 동안 선교사(宣敎師)는, 그가 즉시 조선(朝鮮)에 잠입(潛入)할 수 없게 될 경우에는 그렇게 하라고 북경주교(北京主敎)가 시켰던 대로, 조선과 인접한 만주지방(滿洲地方)의 천주교회를 순회(巡廻)하였다
⑧ 12월(양력)에 周(文謨)神父가 변문(邊門)으로 다시 오니 池(璜)사바와 다른 교우들이 그의 안내자(案內者) 노릇을 하기위하여 와 있었다. 神父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조선식으로 꾸미고, 1794년 12월 23일(양력) 자정쯤 조선(朝鮮)과 그를 갈라놓고 있는 무서운 장애물(障碍物)인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다른 교우(敎友)들이 변문(邊門)과 마주보고 있는 조선쪽의 강 언덕 위에 있는 의주(義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서울에까지 인도(引導)하였는데, 서울에는 1795년 초에 도착하였다. 그의 도착은 천주교인들에게 형언(形言)할 수 없는 위로(慰勞)와 기쁨을 주었으니, 이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天使)처럼 맞아들였다.
⑨ 周(文謨) 神父는 崔(仁吉)마티아가 서울 북촌(北村)에 마련한 집에 머물렀다. 그는 우선 미사성제(聖祭)를 드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準備)시키고,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성직(聖職)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말 공부에 전념(專念)하였다. 성목요일(聖木曜日)에 그는 여러 어른에게 성세(聖洗)를 주었고 또 몇몇 사람에게는 보례(補禮)를 주었으며, 몇 사람에게서는 글로 써서 하는 고백(告白)을 받았다. 마침내 부활절(復活節)에 그는 조선(朝鮮)에서 최초(最初)로 미사성제(聖祭)를 드리고, 그 전날 고해성사(告解聖事)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체(聖體)를 영(領)하여 주는 행복(幸福)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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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