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2. 주문모(周文謨) 神父의 할동 시작과 인도자(引導者)들의 순교(殉敎)
① 6월(양력)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天主敎人들은 그들의 소원(所願)이 극도에 달하여 모두가 신부(神父)를 보고 성사(聖事)받기를 원하였다. 오래지 않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오게 되었다. 周(文謨) 神父는 이 나라의 풍습(風習)을 잘 알지 못하여 오는 사람들을 모두 쉽게 받아들였고, 아무도 조심성을 요구하는 주의(注意)를 할 생각을 못하였다.
이러는 중에, 겨우 몇 달 전에 天主敎人이 되었고, 신앙(信仰)이 별로 굳지 못한 양반집 자식 한영익(韓永益)이라는 진사(進士)가 神父가 있는 곳으로 인도되었는데, 이 면회(面會)로 인하여 그의 마음에는 나쁜 계획(計劃)이 생겨났다.
② 그는 天主敎의 공공연한 적(敵)이요, 그때 조정(朝廷)에서 신임(信任)을 받고 있던 이벽(李檗)의 동생을 찾아갔다. 한영익(韓永益)은 중국인(中國人) 神父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일리고, 그가 숨어있는 집을 가르쳐 주고, 그의 인상(印象)까지 말해 주었다. 영의정(領議政)과 국왕(國王) 자신도 오래지 않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즉시 포졸(捕卒)들을 보내어 가만히 그 외국인(外國人)을 잡아 오라는 명령이 포도대장(捕盜大將) 조규진(趙奎鎭)에게 떨어졌다. 때는 6월 27일(양력) 이었다. 다행히 그 배신자(背信者)를 약간 경계(警戒)하여 그의 행동(行動)을 염탐(廉探)하였던 교우들이 그가 밀고(密告)하였다는 것과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늦지 않게 알 수가 있었다.
③ 周(文謨) 神父는 그것을 알게 되자 즉시 다른 교우(敎友)의 집으로 피신(避身)하였다. 최인길(崔仁吉)마티아가 혼자 남아서 위협(威脅)받고 있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도망하여 살 길을 찾을 수 있었으나, 신부(神父)를 완전히 안전(安全)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사람들이 찾는 중국인(中國人) 행세를 하기로 용감(勇敢)하게 결심(決心)하였다.
그는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나서 중국말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해서 자기의 계획(計劃)이 더 쉽게 성공(成功)하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外國) 사람으로 더 잘 가장(假裝)하기위하여 머리를 자르고 포졸(捕卒)들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들은 집에 도착하자 그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중국인은 어디 있느냐?”
“나요!” 하고 최인길(崔仁吉) 마티아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곧 붙잡혀 포장(捕將) 앞에 끌려갔다. 그들은 착각(錯覺)한 것을 이내 깨달았다. 중국인 신부(神父)는 꽤 숱한 수염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수염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부(神父)를 다시 찾기 시작하였으나, 많은 무죄(無罪)한 사람을 괴롭힐 것을 두려워한 국왕(國王)이, 이 사건(事件)에 있어서 좀 더 온건(穩健)하게 일을 진행(進行)시키라고 명령(命令)하지 않았던들, 아마도 수사망(搜査網)을 오래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③ 그러나 周(文謨) 神父를 모셔 들인 두 사람, 尹(有一)바오로와 池(璜)사바도 같은날 체포되어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와 함께 있게 되었다. 체포(逮捕)된 그날 밤으로 그들은 법정(法廷)에 끌려 나갔다. 그들의 굳은 결심(決心)과 그들의 말의 지혜(智慧)는 재판관(裁判官)들을 당황케 하였다. 명백(明白)하고 용(勇敢)감한 신앙고백(信仰告白)이, 재판관(裁判官)들이 외국신부(外國神父)와 그의 도착과 그의 서울 체류(滯留)에 대하여 하는 모든 질문(質問)에 대한 그들의 유일(唯一)한 대답이었다.
그들에게서 신부(神父)에게 위험(危險)한 자백(自白)을 끌어내기 위하여 여러차례 고문(拷問)을 가하고, 매를 몹시 때리고, 팔과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리고 하였으나, 아무것도 그들의 용기(勇氣)를 꺾거나, 그들의 인내심(忍耐心)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天上)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마침내 임금은 천주교의 원수(怨讐)들이 거듭 내는 요청(要請)에 못 이겨 그들의 결안(結案)에 서명(署名)하였다. 판결(判決)은 그 날 밤으로 옥(獄)안에서 집행(執行)되었고, 순교자(殉敎者)들의 시체(屍體)는 강에 던져졌다. 때는 5월 12일(양력 1975년 6월 28일)이었다. 이때 사바는 29세, 尹(有一) 바오로는 36세,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31세였다.
④ 생명(生命)의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신부(神父)를 조선에 맞아들였던 이 세 용감한 천주교인에게 하느님이 주신 찬란(燦爛)한 상(賞)은 이러한 것이었다. 이 교우(敎友)들은 그들의 신심(信心)으로 말미암아, 1797년에 북경 주교(主敎)로부터 다음과 같은 훌륭한 찬사(讚辭)를 듣게 되었다.
“북경교회와 나는 尹(有一)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을 내왕한 두 번째 여행에서 보여준 신심과 정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견진과 고백과 성체성사를 하도 놀라운 열심히 영하여, 우리 교우들 중 모범적인 겸손과 말과 덕행을 봄으로써 느낀 기쁨과 감탄 속에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1793년에 池(璜)사바가 북경에서 지낸 40일 동안 그의 신심도 목도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신자들은 그가 견진과 고백과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보여 준 그의 정성과 크나 큰 열심과 감투를 보고 많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崔(仁吉)마티아에 관하여는 그가 북경에 온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신앙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으나, 이 교우가 최초의 회장들 중 하나였다는 것과 그의 열심과 신심과 하느님의 영광을 전파하는데 보여준 그의 열성이 뛰어났다는 말을 조선의 선교사에게서 들었습니다.”
⑤ 다른 천주교인 5명이 우리 세 순교자(殉敎者)와 같이 체포(逮捕)되어 그들과 같이 외국인(外國人) 신부(神父)를 조선에 인도(引導)하여 들였다고 고발(告發)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부(神符)의 입국(入國)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主張)하였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들을 배교(背敎)시키려고 했으나, 그들은 거절(拒絶)하고 혹독(酷毒)한 형벌(刑罰) 중에서도 그들의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였다. 보름동안 고문(拷問)을 당한 뒤에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기뻐서 하느님을 찬미(讚美)하고 찬양(讚揚)하며 물러갔다.
⑥ 고발자(告發者) 한영익(韓永益)은 그의 배반(背反)에서 어떠한 이익(利益)도 얻지 못하였다. 그 해 가을에 그는 자기 집안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참(悲慘)하게 죽었다. 그가 죽을 때에 탄식(歎息)하고 눈물 흘리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진실(眞實)한 참회(懺悔)로 하느님에게서 자기 죄(罪)의 용서(容恕)를 받을 수 있었다면 좋겠다.
⑦ 자기를 조선에 인도(引導)하여 들였던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을 잡으려고 사방에 수사망(搜査網)을 펴고 있을 때, 周(文謨) 神父는 어떤 여교우(女敎友)의 집 장작 광속에 숨어 있었다. 신부(神父)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은 이 신입교우(新入敎友)는 강완숙(姜完淑)골롬바라는 여자였다. 강완숙(岡完淑)골롬바는 그 시대 천주교 역사(歷史)에 큰 역할(役割)을 하였으므로, 필자는 그의 생애(生涯)를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