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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6. 초기박해(初期迫害)의 마무리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6. 초기박해(初期迫害)의 마무리


① 이 무렵에 특히 서울에서는 박해의 적극성(積極性)과 준엄성(峻嚴性)이 많이 완화(緩和)되었다. 천성이 온건한 왕은 포악(暴惡)한 처사를 싫어하였다. 왕은 천주교인들에게 대하여 온갖 종류의 달램과 약속(約束)과 유혹(誘惑)의 방법을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방침(方針)이 특히 양반(兩班)들 중에서 배교자(背敎者)를 내는데 성공(成功)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② 지방(地方)에서는 일이 거의 감사(監司)들의 자의(恣意)에 맡겨져 있어서, 이들은 자기 개인의 기분(氣分)이나 편견(偏見)에 따라, 천주교인들을 박해(迫害)도 하고  평화(平和)롭게 내버려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천주교회는 거의 완전한 자유(自由)를 누리는가 하면, 내포(內浦)와 같은 다른 곳에서는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이 늘 괴롭힘을 받고 학대(虐待)를 당하기도 하였다.


   1794년에 우리는 홍주(洪州)에서 새로운 박해(迫害)가 일어남을 보게 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혹심(酷甚)하였는지, 그 범위(範圍)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朴「형화」바오로는 그때 불행이도 배교(背敎)하였다. 우리는 그가 1827년에, 이 잘못을 영광스럽게 보상(報償)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③ 1813년에야 순교의 영관을 얻는 黃바오로는 더욱 용감하였다. 그는 청양(靑陽)고을 제운에서 났는데, 오래 전부터 열심히 천주교를 신봉(信奉)하다가 붙잡혀 본관(本官) 앞에 끌려 나갔다. 관장(官長)은 그에게 말하였다.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라. 그러면 너를 돌아가게 하마.”

“천주께 욕을 하다니요, 그런 일은 짐승들조차도 못할 것인데, 신령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바오로가 대답하였다. 그는 치도곤(治盜棍)을 몹시 맞았으나 잠시도 약해지지 않았고, 오랫동안 매를 맞은 뒤에 다 죽어가는 몸으로 옥(獄)에 다시 끌려가, 다른 수인(囚人)들의 간호를 받고 다시 살아났다. 관장(官長)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놀라, 그에게 매질하는 직책(職責)을 맡기라는 선고를 내렸다. 석 달 후에 黃바오로는 석방(釋放)되었다. 그와 함께 체포(逮捕)되었던 천주교인(天主敎人) 12명 중에서 그를 본받아, 용기(勇 氣)를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배교(背敎)한다는 말로 그 형벌(刑罰)을 모면하였던 것이다.


④ 다른 곳에서도 몇 몇 박해(迫害)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아마 지방적(地方的)으로 괴롭힌 것에 지나지 않아 별로 중대(重大)하지 않은 것 같고, 거기에 대하여는 막연(漠然)한 기억(記憶)밖에는 남지 않았다.


⑤ 조선 천주교회(朝鮮 天主敎會)가 당해야 했던 첫 번 박해(迫害)는 이러하였고, 이 새로 나는 천주교회를 확립(確立)한 피와 눈물의 세례(洗禮)는 이런 것이었다.


⑥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攝理)로, 아마 천주교의 역사상(歷史上) 오직 하나인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가 아무런 목자(牧者)의 도움 없이 세워져서 자라고 굳세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순교자(殉敎者)들의 용기(勇氣), 그 증거자(證據者)들의 항구심(恒久心), 그 교우들의 불굴(不屈)의 정신(精神), 그 존재(存在)까지도 명백한 기적(奇蹟)이 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들의 신앙(信仰)을 증거(證據)하지는 못하였다. 처음으로 입교 한사람들, 가장 유명한 복음전파자(福音傳播者)들이 그들의 비겁(卑怯)한 광경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성공(成功)한 것으로 인하여 생긴, 어떤 은밀한 교만(驕慢)의 罰로 그들이 넘어졌고, 또 많은 이들을 그들의 과실(過失)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른다.


⑦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배반(背反)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놀라운 것, 분명히 하느님의 업적(業績)임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교우 전체(全體)가 배교(背敎)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천주교에 대해서 매우 불완전(不完全)한 지식(知識)밖에는 없었고, 몰래 들여온 한문서적(漢文書籍) 외에는 다른 선생이 없었으며, 그것도 가장 유식(有識)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사(聖事)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도움을 가지고도, 그것을 자주 받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어떠한지를 항상 보는 바이다. 그 이름마저도 알까말까 한, 저 불쌍한 신입교우(新入敎友)들은 어떠하였겠는가?


⑧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恩寵)의 힘만으로, 이 신입교우들 가운데 순교자(殉敎者)들과 증거자(證據者)들과 열렬한 복음전도자(福音傳道者)들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李(承薰) 베드로가 북경(北京)에서 성세(聖洗)를 받은 지 10년 후에, 심한 박해(迫害)와 가장 훌륭한 지도자들의 배반(背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4천명 이상의 천주교인(天主敎人)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가장 위대한 덕행(德行)을 닦는 것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극기(克己)와 순결(純潔) 등,  외교인(外敎人)들이 전혀 모르고 또 이해(理解)할 수도 없는 그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거기에 계시다.


⑨ 박해(迫害)가 가라앉으면서  어느 정도의 평화(平和)가 뒤따랐다. 천주교회는 그것을 이용하여 서로 단결(團結)하고, 침묵(沈黙)과 기도(祈禱) 중에서  서로를 굳세게 하며 새로운 신자(信者)들을 얻기까지 하였다. 훌륭한 지도자(指導者)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기는 權(日身)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형 權(哲身) 암브로시오와,  유명한 丁氏 집안이 남아였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격상 천주교회의 일에는 별로 관여(關與)하지 않았고, 그들이 그것을 지도(指導)하였음도 볼 수가 없다.


⑩ 그때에 지도급에는 중인계급(中人階級)에 속하는  열성(熱性) 있고 능력(能力)있는 사람들로서는 최관천(崔貫泉)요한과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였다. 이들은 그들의 선배와 같은 명성(名聲)도, 훌륭한 가문(家門)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의 진전(進展)에 어떤 지장(支障)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비록 외교인(外敎人)들 눈에는 덜 드러났지만 그들의 진전(進展)은 더 실질적(實質的)이고 더 건실(健實)하였다.


하느님의 섭리(攝理)가 그 학자(學者)들과 양반(兩班)들을, 첫 번 시동을 일으키는데 사용하신 다음, 복음(福音)은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복음(福音)은 그 추종자들의 이름과 지위(地位)와 학식(學識)이 인위적(人爲的)인 생명을 주었다가 그 제창자(提唱者)들과 같이 죽는, 저 철학파(哲學派)들의 하나와 같은 것이 아님을 조선(朝鮮) 사람들에게 이해(理解)시키기 위하여, 거의 즉시 그들을 사라지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전인 견지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좋은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뜻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로다.”(1고린 1:17, 1: 26)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6. 초기박해(初期迫害)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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