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4. 周(文謨) 神父의 사목활동과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활약
① 1796년 9월(양력)에 周(文謨)신부는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처지와 조선천주교회의 현황(現況)을 보고하였다. 경찰의 끊임없는 사찰(査察)과 특히 국경(國境)의 더욱 엄중해진 감시(監視)로 인하여 그 전해에는 周(文謨)신부가 편지(便紙)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② 덕산(德山) 고을 용머리에서 출생한 황필(黃泌)토마스는 1795년 국경(國境)에서 신부(神父)를 기다렸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그 사람 이 밀사(密使)로 뽑혔다. 그는 사신(使臣) 일행 중 한 사람의 하인(下人) 자리를 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황필(黃泌)토마스는 周(文謨)신부의 라틴어편지와 교우(敎友)들의 한문편지가 씌어진 명주 두 조각을 주의 깊게 옷 속에 감추어가지고 길을 떠나, 1797년 1월28일(양력)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③ 구베아(Gouvea)주교(主敎)는 선교사(宣敎師)와 신자(信者)들의 편지를 읽는 동안, 극도의 불안(不安)에서 가장 생생한 기쁨으로 옮아갔다. 周(文謨)신부는 자기의 편지에 조선교회(朝鮮敎會)에 평화(平和)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방법(方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포르투갈 조정(朝廷)에 대하여 사절(使節) 한 사람을 보내어 조선왕(朝鮮王)에게 인사(人事)를 드리게 하여 그와 동맹(同盟)을 맺게 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절(使節)과 함께 수학(數學)과 의학(醫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신부(神父)들을 보내어 그들이 이 나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고, 포르투갈 왕에 대한 경의(敬意)로 그들을 조선정부(朝鮮政府)가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건의(建議)에 대하여 사절(使節)의 파견을 요청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도 전혀 파견(派遣)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④ 周(文謨)신부가 조선말과 이 나라의 풍속(風俗)을 넉넉히 알게 되자 이내 신자(信者)들에게 성사(聖事)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조심하며 행해졌다. 그가 나갈 때에는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어디에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거동(擧動)은 조심스럽게 감춰졌다. 그는 가장 확실(確實)한 교우(敎友)들과만 접촉(接觸)을 가졌고, 대부분은 특히 지방(地方)에서는 조선에 신부(神父)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신부(神父)는 그를 맞아들이는 집안의 식구에게도 아무에게나 자기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고, 누구도 신부(神父)가 와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우(敎友)의 하인(下人)들까지도 그것을 짐작만 하는 때가 많았다. 그 시대의 어떤 교우(敎友)가 쓴 편지(便紙)의 다음과 같은 발췌문(拔萃文)은 비밀(秘密)이 얼마나 엄중(嚴重)하게 지켜졌는지를 알게 하여 준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殉敎)한 신대보(申大甫) 베드로였다. 그는 이 편지를, 조선 천주교의 처음 시기에 관한 모든 기억(記憶)을 정성들여 모으던 샤스땅(Chstan) 神父의 명령에 따라 1838년에 옥(獄)에서 썼다.
⑤『내 친척 이「여진」요한과 나는 5년 전부터 교우(敎友)였으나 별로 열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神父) 보기를 간절히 원하여, 공직(公職)에 있는 내 친구 중 한 교우(敎友)에게 오래 전부터 진이 빠지도록 질문(質問)을 하였습니다. 하룻밤은 내가 그의 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내가 조르는 데에 대한 대답(對答)으로, 일어나서 장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 주며 신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이상히 생각하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장난도 심하구만. 왜 어른에게 아이의 버선을 신으라는 거야?”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에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걸세. 천주교에서는 열심하기만 하면 신부를 볼 수 있네. 그것은 조금만 애를 쓰면 큰 발에도 얼마든지 신을 수 있는 이 버선과 같은 것일세.”
과연 나는 그것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양(西洋)에서 온 버선으로 양털로 만든 것이어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질문(質問)을 거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도 더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열흘 후에 다시 가서 다른 교우(敎友)들에게 물어 보았고, 이번에는 이「여진」요한을 보냈으나, 어디를 가도 절대적인 침묵(沈黙)뿐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여진」요한과 나는 우리 집에서 140리나 떨어진 서울을 차례로 7~8번을 내왕(來往)했으나, 언제나 허사(虛事)였습니다. 이「여진」요한은 좋은 기회(機會)를 더 쉽게 잡기 위하여, 가족(家族)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살기까지 하였습니다… . 어떤 노력(努力)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부(神父)를 보는 위안(慰安)을 결코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부(神父)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消息)을 나중에 듣게 되니 우리의 후회(後悔)는 더할 뿐이었습니다.』
⑥ 하느님의 은총(恩寵)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이 같은 시기(時期)에 이와 비슷한 발걸음을 얼마나 많아 하였겠는가? 그리고 천주교(天主敎)의 도움 가운데 살면서, 그것을 이용(利用)할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그 많은 천주교인(天主敎人)에게는 이 얼마나 큰 교훈(敎訓)인가?
그러나 그렇게도 엄중(嚴重)한 조심을 우리는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신부(神父)가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은 정부(政府)에 알려져 있었고, 사찰(査察)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날마다 체포(逮捕)가 잇따랐다. 양떼 전체(全體)의 생명(生命)이 그의 머리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오직 하나인 목자(牧者)를 보호(保護)하기 위하여 어떤 조심을 하였더라도 지나쳤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⑦ 周(文謨)神父가 이런 비밀(秘密)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조선전설(朝鮮傳說)이 그의 사목활동(司牧活動)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우리에게 전하여 주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알려진 것은 다만 그가 서울에서는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띠노와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과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 집에 몇 번 갔다는 일이다. 그는 또 양제궁(良娣宮) 혹은 폐궁(廢宮)에도 여러 번 갔었고, 거기에 얼마 동안 머무른 듯 하다.
이궁(宮)은 왕의 서제(庶弟) 이인 (李인) 또는 일왕손(逸王孫)의 궁이었는데,그의 아들 심(심)이 반역(反逆)을 꾸몄다는 죄로 사형(死刑)을 받았었다. 대관(大官)들은 그의 아버지도 죽이고자 하였으나, 王은 그것을 허락(許諾)하지 않고 다만 그를 강화도(江華島)로 귀양을 보내는 데에 그쳤다.
⑩ 폐궁(廢宮)에는 여자 둘만 남아 있었으니, 귀양 간 이인(李인)의 아내와 그의 며느리 즉 심(심)의 미망인이었다. 어떤 여교우(女敎友)가 그들의 불행(不幸)을 동정하여 1791년인가 1792년경에 천주교(天主敎)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불행(不幸)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준비(準備)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쉽게 입교(入敎)하였다. 그러나 무슨 불상사(不祥事)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아무도 그들과 감히 접촉(接觸)하지 못했다.
다만 용감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만이 그런 겁을 내지 않고 그 두 왕족(王族)을 보러가고, 神父를 그 집에 모셔가기까지 하여 성사(聖事)를 받게 하였다.이인(李인)의 아내는 송(宋) 마리아요 그의 며느리는 신(申) 마리아였다. 그들은 둘 다 매우 열심하게 되어 그들의 종(從) 여럿을 입교(入敎)시켰으며 명도회(明道會)에 입회(入會)하였다.
그들은 神父를 궁(宮)에 모셔 들이는 것이 몹시도 기뻤다. 神父가 거기에 있을 때는, 같이 붙어있는 홍익만(洪翼萬) 안또니오의 집에서 벽에 비밀히 뚫어놓은 구멍으로 왕래(往來)할 수가 있는, 따로 떨어진 방에 숨어 있었다. 귀양간 이인(李인)도 궁(宮)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방해(妨害)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지 않았다.
⑪ 周(文謨) 神父는 지방순회(地方巡廻)도 여러 번 하였다. 그는 자기를 인도(引導)하여 들여온 여주(驪州) 고을 尹(有一) 바오로의 집에도 갔었고,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 초남(草南)에 사는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오의 집에도 얼마동안 머물렀다. 그가 고산(高山), 염포(鹽浦), 공주(公州), 온양(溫陽) 등의 고을과 내포(內浦)에도 갔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時期)에 이 여러 번의 순회(巡廻)를 하였으며, 성과(成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시대(時代)의 수기(手記)는 우리에게 아무런 사항(事項)도 남겨 놓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어디서나 이 선교사(宣敎師)를 보호(保護)하기로 되어 있던 엄중한 비밀(秘密)과, 박해(迫害)로 인하여 일어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大部分)의 교우(敎友)들이 그 때 성사(聖事)를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⑫ 그런데 교우들이 周(文謨) 神父를 칭찬하는 데는 일치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周(文謨) 神父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지경이었다. 그는 금식(禁食)을 하고 자기본분(自己本分)에 자기를 온전히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從)의 덕행(德行)의 광채를 기적(奇蹟)으로 더 빛나게 하고자 하신 것 같다.
믿을 만한 전설(傳說)에 의하면, 그가 서울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창골에 화재(火災)가 났었다고 한다. 불은 24시간을 계속하였는데, 그때에 神父는 그 무서운 피해(被害)를 딱하게 여겨, 자신은 현장(現場)에 갈 수가 없었으므로, 송(宋)필립보의 젊은 아들을 보내어 성수(聖水)를 뿌리라고 명령하였다. 젊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안 周(文謨) 神父는 기도(祈禱)를 드리고 있었는데, 거의 즉시 바람의 방향(方向)이 바뀌어 폐허(廢墟)밖에 남지 않은 쪽으로 불길이 몰아쳤다고 한다.
⑬ 조선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周(文謨) 神父의 조심성과 재능(才能), 열성(熱性), 덕행(德行)등은 일반 사람들의 수준(水準)을 넘는 것이었다. 그는 위험(危險)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많은 첨단(尖端)으로 둘러싸서 그 모서리를 감추기에 이른 규(圭: 옛날 왕조들의 고관을 나타내는 상아조각)와도 같이, 조심성과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많이 써서 모든 위험(危險)한 고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조선(朝鮮)에 들어왔을 때에는 천주성교(天主聖敎)가 막 탄생한 길이었다. 그 교리(敎理)의 광채(光彩)는 마치 천주교인들의 큰 무지(無知)로 가려져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불행(不幸)을 막기 위하여 그는 책을 짓고 직접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단호(斷乎)하고 지혜(智慧)로운 수단(手段)으로 폐습(弊習)을 고쳐, 모든 이로 하여금 신앙(信仰)의 실천(實踐)을 충실히 하도록 하기에 성공(成功)하였다.
그는 북경(北京)에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는 비슷한 회(會)를 본을 떠서 명도회(明道會) 즉 천주교 교리(敎理)를 가르치는 회(會)를 세웠는데, 그에 대하여는위에서 말 한 바 있다. 명도회원(明道會員)들의 목적(目的)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깊은 지식(知識)을 얻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교우(敎友)와외교인(外敎人)들에게 전파(傳播)하도록 서로 격려(激勵)하고 서로 도와주는 데 있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그스띠노가 그 회의 회장(會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다음에 周(文謨) 神父는 시내에서 회합(會合)을 가져야 하는 장소(場所)를 정하고, 집회(集會)를 주관하여야 하는 지도자(指導者)들을 임명하고, 남자들은 여자와 서로 떨어져 회의에 참석하도록 정하는 등,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다.
周(文謨) 神父의 열성(熱性)에 감화되어, 많은 회원은 지도자(指導者)들이 매달 각 회원(會員)에게 나누어 주는 표지(標識)를 받으러 서둘러 모여들었다. 그 표지(標識)에는 교회(敎會)에서 공경(恭敬)하는 성인(聖人) 들 중의 하나를 주보(主保)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이 주보(主保)의 표지(標紙)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천(實踐)은 차차 전국에 퍼져서 신기(神奇)한 결과(結果)를 냈다.
⑭ 周(文謨) 神父는 자기의 모든 노력을 하는데 있어서 강완숙(姜完淑)골롬바의 매우 효과적(效果的)인 협력(協力)을 얻었다. 집안에서는 강완숙(姜完淑)골롬바가 神父의 시중을 들면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였으며, 밖으로는 모든 중요한 일에 관여(關與)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하는 일을 축복(祝福)하시어 언제나 성공(成功)하게 도와주셨다.
강완숙(姜完淑)골롬바는 견실(堅實)한 지식(知識)에 크나큰 말재주를 겸하였으므로 여자(女子)들을 많이 입교(入敎)시켰는데, 그 중에는 높은 양반집 부인(婦人)들도 상당히 있었다. 국법(國法)은 반역죄(反逆罪)를 제외하고는 양반집 부인(婦人)들에게 형벌(刑罰)을 가하지 않았으므로, 이 여자신입교우(女子新入敎友)들은 정부(政府)의 금령(禁令)을 개의치 않았다.
⑮ 강완숙(姜完潚)골롬바는 처녀(處女)들도 많이 모아서 단단한 교육(敎育)을 시켰다. 그녀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녀의 집에 와서 사는 동정녀(童貞女) 윤점혜(尹占惠) 아가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동정녀(童貞女)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올 것이다. 그 처녀(處女)들이 결혼(結婚)한 다음에는 각기 열성(熱性) 있는 사도(使徒)가 되어 그들이 새로 들어간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天主敎 信仰)을 전하여 부모(父母) 친척(親戚)과 친지(親知)들을 입교(入敎)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비상한 정력(精力)과 활동력(活動力)을 타고 났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恩寵)의 도움을 받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모든 자선사업(慈善事業)을 고무(鼓舞)하고 지도(指導)하였다. 모든 교우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우러러보았다. 교우(敎友)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강완숙(姜完淑)골롬바는 힘차고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고, 이를테면 모든 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남자들 중에 열심한 교우가 많았으나, 모두가 기꺼이 그녀의 교화를 받고,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이 정확하게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그녀는 불이 짚에 붙듯 열심한 그녀의 애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복잡한 일과 크나큰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녀는 마치 뒤엉킨 뿌리 뭉치를 확실하게 끊고 가르는 손과 같이 능란하게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천주교(天主敎)가 이룩한 진전(進展)의 대부분은 그녀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 발전(發展)은 매우 큰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要約)할 수 있다.
周(文謨) 神父가 오기 전에는 조선의 천주교인(天主敎人)이 약 4천명 이었는데, 몇 해 후에는 그 숫자가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상, 본문 상권 393쪽까지―
-샤를르 달레 神父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