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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제 2장 정조(正祖) 말년(末年)의 박해(迫害)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제 2장 정조(正祖) 말년(末年)의 박해(迫害)

<부분적인 박해 ― 이도기(李道起) 박취득(朴取得) 프란치스꼬 등의 殉敎

― 국왕의 승하(昇遐)

 

1. 부분적으로 박해(迫害)는 계속되고

 

① 필자는 周(文謨) 神父가 조선에 6년간 머무르는 동안에 행한 사도적(使徒的) 업적(業績)을 아는 대로 요약(要約)하였다. 이 거룩한 선교사(宣敎師)의 생애(生涯) 의 마지막을 장식한 영광스러운 승리(勝利)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기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證據)한 증거자(證據者)와 순교자(殉敎者)들의 이름과 행적(行蹟)을 알려야 하겠다.

 

② 외국인 神父를 맞아들인 세 사람의 죽음이 박해(迫害)를 완전히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천주교(天主敎)의 원수(怨讐)들은 천주교인들을 다시 괴롭히도록 명하라고 王에게 간청하였고, 王은 온건(穩健)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조정(朝廷)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정약용(丁若鏞)은 금정(金井)의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이미 한 번 배교(背敎)하였었는데, 자기의 임지(任地)에 도착하자, 자기가 천주교인(天主敎人)이었던 죄를 더 잘 보상(報償)하기 위하여, 비겁하게 몇몇 교우(敎友)를 괴롭히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파(反對派)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그는 마침내 자기의 배교(背敎)를 명백히 밝히는 상소(上疏)를 왕에게 올렸다. 그렇게 하고서야 좀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③ 李(承薰) 베드로는 오래 전부터 천주교를 버렸었고, 자기의 배교(背敎)를 공공연한 글을 써서 알렸다. 그런데도 예산(禮山)으로 귀양을 가서 1년을 지냈다. 거기서 그는 또 한 번 자기 처신(處身)에 대한 변호문(辯護文)을 발표하였고, 천주교인들과 관계(關係)를 끊는다는 것과 그들의 교리를 배반(背叛)하였다는 것을 공언(公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하도 사람들의 멸시(蔑視)를 받아, 아무도 그를 믿으려 하지 않게 되었다.

남인(南人)의 수령(首領)이요, 전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이가환(李家煥)까지도 좌천 되어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임명되었다. 이 사람은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초기(初期)에 이벽(李檗)과 토론하여, 천주교의 진리(眞理)를 인정하였지만 입교(入敎)하기를 거부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본문8~9쪽참조).

이가환(李家煥)이 교중(敎中)에 낀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천주교인들을 박해(迫害)하였으며, 새 임지(任地) 충주(忠州)에서도 같은 방침(方針)을 따랐다. 그는 천주교인들의 금육일(禁肉日)을 골라, 자기 집에 선비들을 초대(初代)하고 그들에게 고기를 대접하게 하여, 천주교(天主敎)를 신봉(信奉)하는지 안하는지를 알아보았다는 말이 있다. 위에서 말한 세 도시 금정(金井), 예산(禮山), 충주(忠州)는 일부러 골라서 좌천(左遷)된 관리들의 임지로 하였던 것이다.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이 비교적 그곳에 많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에게 무섭게 하고, 외교인(外敎人)들의 입교(入敎)를 방해하고자 한 것이었다.

 

④ 두 사람은 배교자(背敎者)요 한 사람은 외교인(外敎人)이었던 이 유력(有力)한 세 사람의 실총(失寵)은, 천주교인들의 원수(怨讐)들이 새 종교를 무너뜨리기만을 원한 것이 아니고, 남인(南人)들을 그 중요한 지도자(指導者)들을 통하여 꺾고자 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기회(幾회)에 王이 취한 태도(態度)에 대하여는 순교자(殉敎者) 黃(詞永) 알렉산델의 수기(手記)에 다음과 같이 설명(說明)되어있다.

『선왕(先王)은 중국(中國)에 대하여 염려가 없지 않았다. 이 나라의 神父가 조선에 와 있다는 사실은 북경(北京) 정부와의 사이에 어려운 문제(問題)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 神父가 있는데 대한 확실한 증거(證據)가 법정(法廷)에서 드러난 만큼, 그 사실(事實)을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어려운 문제였다.

한편 선왕(先王)의 성격은 과격(過激)한 조치(措置)를 싫어하였다. 그는 전국적(全國的)인 박해(迫害)는 결코 허락(許諾)하고자 하지 않았고, 몇몇 경우에 사형선고문(死刑宣告文)에 서명(署名)한 것도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하였던 것이다. 왕은 신부를 조용히 처리하고, 천주교인들을 형벌(刑罰)보다는 유혹(誘惑)과 위협(威脅)으로 배교(背敎)시키기를 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신하들에게 국교(國敎)에 대한 열성이라는 말을 쓴 정치적(政治的) 증오심(憎惡心)을 아주 잘 (看破)하였으나, 거기에 대항(對抗)할 힘이 없었고, 흔히는 지방(地方)의 여러 관리(官吏)들이 자기의 이름으로 천주교인들에게 저지르는 (過激)한 처사(處事)를 눈감아 주었다. 대부분의 지방 관리들은 조정(朝廷)의 지지(支持)를 받고 있음을 눈치 채고, 그들의 탐욕(貪慾)과 원한(怨恨)을 마음껏 만족(滿足)시켰다.

 

 

※ 김토마스의 희생

 

① 그들에게 처음으로 희생(犧牲)된 사람들 중 하나는 김풍헌(風憲)(면장이나 세금징수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김 토마스였다. 그는 충청도(忠淸道) 청양(靑陽)고을 중인(中人) 가정에 태어나 약간의 교육(敎育)을 받았었다. 그는 곧고 꿋꿋한 성격으로 (同鄕人)들의 존경(尊敬)을 받았었고, (風憲)된 것도 그들의 요구(要求)에 의한 것이었다,

 

②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되어서도 그는 자기의 직책(職責)을 계속하였다. 그는 열심히 교회의 본분(本分)을 지키고, 기도(祈禱)와 신심서적(信心書籍)을 읽는데 전심(全心)하였으며, 가족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과 화목(和睦)하며 살았다.

그는 병진(丙辰)(1796)년에 붙잡혀 청양 관아(官衙)로 압송(押送)되어 가서 매우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당해야 했다. 마른 쑥잎을 항문(肛門)에 얹어 놓고 태우기까지 하였으나, 어떤 것도 그에게 신앙(信仰)을 배반(背叛)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보습을 빨갛게 달구어, 버선을 벗고 그 위를 걸어가라고 명하였다. 그가 그대로 하려고 하는 참인데, 그를 미쳤다고 말하며 제지하였다. 그것은 십자가(十字架)를 향한 거룩한 미침이었다.

 

③ 김토마스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았다. 사형(사형)이 집행(집행)되기 사흘 전에 그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북소리에 맞추어 장마당을 세 번 돌게 하였다. 그러는 중에 청양현감(靑陽縣監)이 파면(罷免)되어, 김토마스가 사형집행(死刑執行)을 간청(懇請)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사건(事件)은 신관(新官)의 부임까지 연기(延期)되었다. 신관(新官)은 재판기록(裁判記錄)을 검토(檢討)한 후 증거자(證據者)를 옥에서 내놓고, 보석(保釋)을 하여 어떤 개인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며칠 후에는 자기 고을에서 나가라는 명령(命令)을 내렸다.

 

④ 김토마스는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받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탄식(歎息)하다가,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자기는 행복(幸福)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제부터 그에게는 나라와 집과 가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차례로 부여(扶餘), 금산(錦山), 고산(高山) 등 고을에서 살면서, 교우(敎友)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아무것도 없는 극빈생활(極貧生活)을 하였다. 신자들이 옷이나 새 신발을 주면, 그는 아름다운 옷은 교만(驕慢)을 길러준다고 말하며, 거지를 마나면 그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는 흔히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않았으며, 그가 먹는 음식이란 아주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⑤ 1801년 박해가 더 치열(熾熱)하여지자 김토마스는 자기의 가족(家族)들을 데리고 산골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여기서 섭리의 명령을 기다려라. 나는 순교를 하지 못한 것을 늘 마음속으로 원통히 생각해 왔는데, 기회가 좋으니 자수하련다.󰡓

사람들은 그가 없으면, 그의 가족(家族)이 모두 굶어죽을 것이며, 그뿐 아니라 그 역시 천주(天主)의 명령(命令)을 기다려야 할 것임을 상기시켜, 겨우 그를 말리기에 성공하였다. 그는 순교(殉敎)의 은혜(恩惠)를 받을 희망(希望)을 늘 품고 있었으나, 하느님께서는 그의 원(願)을 달리 들어주셨다.

며칠 후인 같은 해 1801년 7월에 그는 용담(龍潭)고을 한고기(안고개)에서 병이 들었다. 죽기 전날 그는 자기가 다음날 죽을 것이라고 미리 말하였다. 시간이 되자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집 마당으로 데려다 달래서, 무릎을 꿇고 지극히 겸손(謙遜)한 자세(姿勢)로,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 변절자(變節者) 홍락민(洪樂敏) 루가


그러나 천주교인(天主敎人)들 모두가 이런 용기(勇氣)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1797년 조정(朝廷)에서 꽤 높은 관직(官職)에 있던 홍락민(洪樂敏) 루가가 직무상 천주교의 사정(事情)에 관한 보고(報告)를 왕에게 그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나약(懦弱)하여 모호한 말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보고서(報告書)를 만들었는데, 자기의 비겁(卑怯)을 기뻐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가 천주교인(天主敎人)임을 아는 王은 그의 정직(正直)하지 못함과 솔직(率直)하지 못함을 나무라고, 공직(公職)에 있는 자는 임금에게 언제나 자기 생각대로 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하느님의 경고(警告)로 받아들이기는 고사하고, 洪(樂敏) 루가는 그의 답변(答辯)에서, 천주교에 대하여 떠돌고 있는 가증스런 무함(誣陷)을 왕에게 일러바치고, 천주교인들을 괴롭힐 것을 王에게 청하기까지 하였다. 王은 매우 불만족(不滿足)하여, 그 후로는 자기의 불쾌(不快)와 멸시(蔑視)를 배교자(背敎者)에게 깨닫게 할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나중에 홍락민(洪樂敏) 루가가 하느님께 용서(容恕)와 순교(殉敎)의 영관(榮冠)을 받는 행복(幸福)을 얻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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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제 2장 정조(正祖) 말년(末年)의 박해(迫害)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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