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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신부님의 천주교회역사

[스크랩] 4. 초대교회(初代敎會) 지도자(指導者)들의 순교(殉敎)

 

 

 

韓國天主敎會史 

     ― 韓國天主敎會史에서 보여준 순교자들의 모습들 ―

 

4. 초대교회(初代敎會) 지도자(指導者)들의 순교(殉敎)


① 이 유명(有名)한 모든 사람들의 재판(裁判)은 오래 걸릴 것이 없었으니, 그들의 운명(運命)은 이미 결정(決定)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당한 신문(訊問)과 형벌(刑罰)의 자세한 내용(內容)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필자(筆者)가 입수한 공문서(公文書)의 몇 가지 단편(斷片)은 그들이 모두 외국(外國)의 사악(邪惡)한 종교(宗敎)를 믿었다고 기소(起訴)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만이 그밖에 또 불경죄(不敬罪)와 반역죄(反逆罪)로 기소(기소)되었음을 우리는 앞에서 언급(言及)한 바와 같다.

   변론(辯論)이 끝나기 전 2월 21일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는 66세로 옥에서 죽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매를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상처가  덧났거나 굶어서 죽었다고도 한다.

    나흘 뒤에 갇혀 있는 모든 교우(敎友)가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았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의 형제(兄弟)들인, 정약용(丁若鏞) 요한과 정약전(丁葯銓)은 그와 비슷한 경우에 이미 한심한 나약(懦弱)함을 보였었는데, 자기들의 형의 권고(勸告)와 간청(懇請)과 눈물과 고상한 본보기를 짓밟고, 배교(背敎)함으로써 목숨을 구하는 비겁(卑怯)을 또 한번 보여주었다. 결국(結局) 그들에 대한 사형선고(死刑宣告)는 유배형(流配刑)으로 감형(減刑)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둘 것은, 몇 해 후에 특사(特赦)로 귀양이 플려난 정약용(丁若鏞) 요한은 자기의 죄를 오랫동안 진심(眞心)으로 통회(痛悔)하였고, 그의 모범적(模範的)인 열심과 극기(克己)는 많은 교우들을 위로(慰勞)하였으며, 매우 감화(感化)를 주는 죽음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종교서적(宗敎書籍)을 남겼고, 특히 복음(福音)이 조선(朝鮮)에 들어온 과정(過程)에 대한 수기(手記)를 남겼는데, 우리들이 읽고 있는 이 역사(歷史)에 지금까지 기록(記錄)한 사실(事實)들은 대부분이 그의 수기(手記)에 의한 것이다.


② 이가환(李家煥)의 죄목(罪目)은 패배한 당파(黨派)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指導者)  중의 하나라는 것뿐이었는데, 교우(敎友)라고 사형(死刑)이 언도(言渡)되고 옥에 갇혀 음식(飮食)도 먹지 못하고 7일 동안 고통(苦痛)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천주교(天主敎)를 잘 알고 있었으나, 많은 다른 학자(學者)들과 같이 천주교(天主敎)의 영광(榮光)보다는 인간적(人間的)인 영광을 사랑하였고, 회개(懷改)한다는 어떤 표시(表示)도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길고 고독한 임종(臨終)의 어떤 순간(瞬間)에,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죽게 되는 그 그리스도를 인정(認定)하고 예배(禮拜)하는 행복(幸福)을 얻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비밀(秘密)이다. 어떻든 이 불행한 대신(大臣)의 후손(後孫) 중 많은 사람이 지금은 열렬(熱烈)한 천주교인(天主敎人)이다.


③ 다른 6인의 사형수(死刑囚), 즉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최창현(崔昌顯) 요한, 홍교만(烘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홍락민(洪諾敏) 루가 및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2월 26일(1801년 4월 8일) 서소문(西小門)밖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당하였다.

   그때 이승훈(李承薰)의 나이는 45세였다. 그의 결안(結案)은 다음과 같다.

 『서양(西洋)의 나쁜 책들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유례(類例)가 없는 흉악(凶惡)한 것이다. 거짓말로 예수라는 자를 선전(宣傳)하여 세상(世上)을 속인다. 그것들이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이라 하는 것은 불도(佛道)를 모방(模倣)한 것이며, 신부(神父)라는 것은 인륜(人倫)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들은 재물(財物)과 여자(女子)들을 공동(共同)으로 소유(所有)할 수 있으며, 형벌(刑罰)과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들의 말은 모두 악랄(惡辣)하고 난잡(亂雜)하고 뻔뻔스러운 것이니, 성현(聖賢)들은 그것을 배척(排斥)해야 하고 백성(百姓)들은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被告)는 영세(領洗)를 하고 그 책들을 사서 만 리(萬里)나 되는 곳에서 가져와 친척(親戚)과 인척(姻戚) 사이에, 서울과 시골에, 가까이 또는 멀리 퍼뜨렸다. 그것은 또 사소한 일이다. 그는 양인(洋人)들과 상통(相通)하고 그들과 연락(連絡)하였으며, 有一(윤 바오로)과 더불어 고약한 비밀음모(秘密陰謀)를 꾸몄고, 若鍾(아우구스띠노)와 함께 가증(可憎)스러운 일을 꾀하였다. 임금께서 법(法)을 내리셨을 때 피고(被告)는 자기를 인도(引導)하는 악령(惡靈)들을 거울 속에서 보듯 하였으며, 겉으로는 회개(悔改)하는 체 하면서 내심(內心)으로는 타락(墮落)과 무분별(無分別)을 계속하였다.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의 그 악랄(惡辣)한 도당(徒黨)과 그 불쾌한 무리 중에 그를 종교(宗敎)의 두목으로 알지 않고, 그를 아비라고 부르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죄악(罪惡)을 저지르고 나서 어떻게 그가 천지간(天地間)에 용납(容納)될 수 있으랴!  모든 증거(證據)가 드러나고 모든 죄악(罪惡)이 백일하에 나타났으니, 하늘의 법(法)이 빛나고 국왕(국왕)의 법(法)이 지엄(至嚴)하다. 저는 그것을 인정(認定)합니다.』

   이와 비슷한 모든 문서(文書) 끝에 나타나는 마지막 세 마디는 모든 사형수(死刑囚)들이 자발적(自發的)으로나 강제적(强制的)으로 서명(署名)해야 하는, 동의(同議)한다는 상투적인 말이다.


④ 이승훈(李承薰)의 죽음은 이가환(李家煥)의 죽음보다 훨씬 더 비참(悲慘)하였다.  어떤 죄인(罪人)에게도, 죄(罪)를 뉘우치기에는, 이보다 더 훌륭하고 더 쉬운 기회(幾會)가 주어진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천주교인(天主敎人)이건 천주교인이 아니건 간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背敎)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으니, 하느님께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行爲))로, 그는 피할 수 없는 형벌(刑罰)을 승리(勝利)로 바꿀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듭되고 고집스러운 비겁(卑怯)이, 하느님의 인내심(忍耐心)을  지치게 한 모양이었던지, 그는 자기의 배교(背敎)를 철회(撤回)하지 않고 통회(痛悔)한다는 조그마한 표시(表示)도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맨 처음으로 영세(領洗)한 그가, 자기 동포(同胞)들에게 성세(聖洗)와 복음(福音)을 가져왔던 그가, 순교자(殉敎者)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으면서도, 순교자(殉敎者)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天主敎人)이라 하여 참수(斬首)를 당하였으나, 배교자(背敎者)로 죽었다.  하느님, 당신의 심판(審判)은 얼마나 정의(正義)롭고 무섭습니까?

    이 무서운 죽음은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물론이고 외교인(外敎人)들까지도 아연실색(啞然失色)케 했다. 이승훈(李承薰)의 시신(屍身)은 사흘 후에 생전의 그의 집으로 운반(運搬)되었으나, 아무도 감히 상례적(喪禮的)인 조문(弔問)을 하러 가지 못하였다. 그의 친척(親戚)과 친구중의 하나인 심유(沈유)라는 사람만이 상복(喪服)을 입고 그 집에 갔으나, 그의 처신(處身)은 주변 사람들의 불평(不評)을 자아냈다.

   그 이후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많은 친척(親戚) 중에서 천주교인(天主敎人)은 극히 적으며, 그의 친척(親戚)들의 대다수는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적의(敵意)로 항상 유명(有名)하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어 많은 집안의 그루터가 되었으나, 그 중 두 집안만이 오늘 천주교(天主敎)를 믿고 있다.

 

⑤ 이제부터는 이 슬픈 광경(光景)에서 눈을 돌려, 보배로운 죽음을 바라다보기로  하자.

    그렇게도 곧은 성격(性格)과 그 고귀(高貴)한 진실성(眞實性)으로 선왕의 총애 愛)를 받았던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결연히 형장(刑場)으로 걸어 나갔다.  망나니는 아직 경험(經驗)이 적어서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자르지는 못하였다.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손을 자기의 상처(傷處)에 갖다 댔다가,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떼어 주의(注意) 깊게 들여다보며 외쳤다.

  ꡒ보배로운 피!ꡓ

   과연 보배로운 피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당(天堂)의 값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칼질은 그에게 천당문(天堂門)을 바로 열어주었다.


⑥ 다음에는 열성(熱性)있는 회장(會長)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차례가 왔다. 포도청(捕盜廳)에서 신문(訊問)을 당하는 중에 그는 잠깐 마음이 약하여졌으나, 하느님이 도우러 오셔서 은총(恩寵)이 곧 다시 우세(優勢)해졌다.

   금부(禁府)에 이르자마자 그는 용감(勇敢)하게 자기의 모호한 말을 취소(取消)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결안(結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이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때 그는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호교론(護敎論)을 써서 관리(官吏)들에게 제출(提出)하기까지 하였고, 이튿날은 자기의 피로 그것을 봉인(封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⑦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64세였다. 그의 최후(最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관리(官吏) 자신들이 그의 결안(結案)에 아래와 같은 말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의 끈기에 대한 훌륭한 찬사(讚辭)를  한 셈이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의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감히 말한다.  그의 고집은 목석보다도 더 강하였다. 그에게는 모든 형벌이 너무 경하다.」


⑧ 홍락민(洪樂敏) 루가는 몇 해 전에 공공연하게 또 여러 차례에 걸쳐, 천주교(天主敎)를 배반(背反)하였으므로, 금부(禁府)에서는 그를 살려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귀양의 판결(判決)을 받았고, 관례(慣例)에 따라 우선 다리에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거기에서 하느님이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 고문(拷問)을 당하는 동안에 신덕(信德)과 통회(痛悔)와 용감(勇敢)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나, 그는 머리를 들고 관리(官吏)들에게 말하였다.

  ꡒ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는 하늘과 땅과 천신과 만물의 주재자 이십니다. 이보(利寶)(중국의 사도(使徒) 마테오 리치(Ricci)神父의 조선 이름)와 다른 선교사들을 우러러볼 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證據)하고자 합니다.ꡓ

   재판(裁判)을 주재(主宰)하던 정승(政丞)들은 이 신앙증거자(信仰證據者)의 말에 격노(激怒)하고 경악(驚愕)하였으며,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웅성거렸다. 곧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어 방금 일어난 일을 아뢰니,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몹시 노하여 홍락민(洪樂敏)루가에게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가하라는 명을 보냈다.

   그의 몸은 매질로 으스러졌다. 옥으로 다시 끌려간 그는 상처(傷處)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ꡒ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ꡓ고 말하였다.

    그의 결안에 의하면, 홍락민(洪樂敏) 루가는 죽음을 자기의 이전 배교(背敎)에 대한 벌(罰)로 기꺼이 당한다고도 말하였다 한다. 그가 형장(刑場)에 가기 위하여 수레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그는 이렇게 하여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하여 우리에게 남겨준 그 시대(時代)의 저자(著者)는 다음과 같은 매우 주의(注意) 할만한 말을 덧붙였다.

  ꡒ처음에는 굳세다가 마지막에 가서 굴복하는 자가 많다. 죄를 지은 뒤에 다시 일어나고, 배교(背敎)하였다가 순교자(殉敎者)가 되는 것은 보통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단언하는 바에 의하면, 홍락민(洪樂敏) 루가는 매일 묵주신공(黙珠神功)을 드렸다고 한다. 공무(公務)를 집행(執行)하는 중에도, 그의 집에 찾아오는 많은 손님과 친구들 가운데서도, 그는 묵주신공을 한 번도 궐(闕)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신심실천(信心實踐)이 그에게 그렇게도 비상한 은총(恩寵)을 받게 해 주었을 것이다.ꡓ

   신입교우(新入敎友)의 글에서 이런 감격스러운 생각을 발견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실(眞實)한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말하자면 본능적(本能的)으로 천주성모(天主聖母) 마리아의 지극히 능하신 전구(轉求)에 대하여, 똑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證據)이다.

  

⑨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의 최후(最後)는 그의 일생(一生)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형장(刑場)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아주 빛났다. 도중에 수레 끄는 사람을 불러 목이 마르다고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무라자 그는,

ꡒ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ꡓ

   하고 대답하였다.

    옥중(獄中)에서도 법정(法廷)에서도 지치지 않고 전도(傳導)를 한 그는. 그의 순교장소(殉敎場所)도 매우 웅변적(雄辯的)으로 만들었다. 형구(形具) 앞에 앉아 그는 그것을 행복스럽게 들여다보고 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여 외쳤다.

  ꡒ스스로 존재(存在)하시고 무한히 흠숭(欽崇)하올 천만물의 대주재자(對主宰者)이신 이가 당신들을 창조(創造)하셨고 보존(保存)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悔改)하여, 당신들의 근본(根本)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根本)을 어리석게 멸시(蔑視)와 조소(嘲笑)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羞恥)와 모욕(侮辱)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ꡓ

    형리(刑吏)들이 그의 말을 중단(中斷)시키고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ꡒ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처다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ꡓ

   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벌벌 떨면서 감히 목을 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감탄(感歎)보다는 징벌(懲罰)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자신 없는 손으로 첫 번 칼을 내리쳤다.

   목은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았고,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일어나, 보라는 듯이 크게 십자성호(十字聖號)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첫 번의 자세(姿勢)로 돌아가 치명적(致命的)인 일격을 받았다.

   천주교(天主敎)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有名)한 인물(人物) 중의 하나이며, 가장 위대(偉大)한 순교자(殉敎者) 중의 하나인 사람이 42세의 나이로 이렇게 죽었다. 그의 시신(屍身)은 정성스럽게 거두어져서 그 가족(家族)이 살고 있던 읍내로 옮겨가 장례(葬禮)를 지내게 하였다. 그의 친척(親戚)과 인척(姻戚)들은, 외교인(外敎人)이건 천주교인(天主敎人)이건 그의 무덤에서 여러 사람이 기적적(奇蹟的)으로 병이 나았다고 단언한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반역죄(反逆罪)로 기소(起訴)되었었다. 따라서 그의 재산(財産)은 모두 정부(正副)의 특별명령(特別命令)으로 몰수(沒收)되었다. 그의 적(敵)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집안이 복권(復權)되는 것을 영구히 막아, 복수(復讐)를 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한 것 같다.


⑩ 같은 날, 즉 2월 26일 또 하나의 사형선고(死刑宣告)가 내려졌으니, 그것은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使徒) 이「단원」존창(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에게 내린 것이었다.

    그는 1791년 배교(背敎)한 뒤에 진실히 뉘우쳐 다시 열심히 교회(敎會)의 본분(本分)을 시작하였었다. 그는 주문모(周汶謨) 신부를 볼 수 있었고, 얼마 동안 그의 곁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신부(神父)는 그에게 자주 이러한 말을 하였다.

  ꡒ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한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할 것이오.ꡓ

  그래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는 끊임없이 순교(殉敎)를 준비(準備)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감사(監司)의 명령으로 1795년 말경에 체포(逮捕)되어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당하였으나 굽히지 않았고, 자기의 고향(故鄕)인 천안(天安)으로 송환(送還)되어, 매를 때리는 형리(刑吏)의 일을 하게 되었다. 조선(朝鮮)에는 흔히 있는 이 징벌(懲罰)은 양민(良民)의 신분(身分)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군수(郡守)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에게 이런 천한 직분(職分)을 시키지는 않고, 어떤 개인 집에 보석(保釋)하여 두는 것으로 만족(滿足)하였다. 그는 1801년 재판(裁判)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약 6년 동안 관헌(官憲)의 감시(監視)를 받으며 이렇게 지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그를 신문(訊問)하라는 명령(命令)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衙前)들은 그들의 존경(尊敬)을 얻고, 또한 그들의 자식(子息)들에게 헌신적(獻身的)으로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을 과히 괴롭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는 이 오랜 시련(試鍊)중에도 꿋꿋한 태도(態度)를 보였다. 그는 꾸준히 모든 사람들이 알게 종교(宗敎)의 본분(本分)을 다하였고, 말과 모범(模範)으로 그 지방(地方)에 큰 이익(利益)을 가져다주었다.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기 가족(家族)을 보러 갈 허락(許諾)을 받아, 거기에 가서 천주교(天主敎)의 현황(現況)을 알아봤다. 그때 그는 교우(敎友)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그들의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을 모두 동네광장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消息)을 듣고 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고, 마음이 몹시 아파, 한권이라도 불태움을 모면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떤 교우(敎友)가 몰래 감추어두었던  두 권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王이 승하(昇遐)한 후 박해(迫害)가 더 가혹(苛酷)해졌을 때, 이존창(李存昌)루도비꼬는 먼저 청주(淸州)로 이감(移監)되어 신문(訊問)을 받았고, 다음에는 서울로 옮겨져 거기에서 최창현(崔昌顯) 요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 및 그  동료(同僚)들과 함께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던 것이다.

   주민(住民)들을 무섭게 하기 위하여, 정부(政府)는 그가 오랫동안 복음(福音)을 전하였던 충청도(忠淸道)의 감영(監營)이 있는 공주(公州)에서, 그의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하라는 명령(命令)을 내렸다. 거기에서 그는 서울의 순교자(殉敎者)들보다 이틀 후인 2월 28일(1801년 4월 10일) 참수(斬首)되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가서야 떨어졌다고 한다.

   그의 친척(親戚) 중 몇 사람이 사형집행(死刑執行) 현장(現場)에 있었지만,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 귀중(貴重)한 유해(遺骸)를 거두어, 가족묘지(家族墓地)로  옮길 수 있었다.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희끄무레한 실낱같은 흉터가 둘러져 있는 외에 다른 흔적(痕迹)은 없었다고 한다.

    李「단원」존창(存昌) 루도비꼬는 첫 번 박해(迫害) 때 나약(懦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朝鮮)에 있어서의 복음전파(福音傳播)에 가장 많이 활동(活動)한 이들 중 한 사람임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오늘의 우리 교우(敎友)들 대부분(大部分)이 그가 그때 입교(入校)시킨 사람들의 후손(後孫)들이다. 그러므로 내포(內浦)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의 기억(記憶)을 우러르고 있다. 이상스런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이지만, 조선 최초(最初)의 신부(神父) 두 사람이 그의 집안이었으니,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神父)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 (孫子)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神父)는 그의 조카의 손자(孫子)였다. 그의 직계(職階)의 후손(後孫)은 지금은 끊어졌다

 

⑪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가 승리(勝利)를 거둔지 보름 후에, 같은 공주(公州) 읍     내(邑內)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또 한 교우(敎友)의 사형집행(死刑執行)이 있     었다. 다음에 소개(紹介)하는 몇 가지 사항(事項)은 어떤 사정으로 그때 옥(獄)      근처에 갔다가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똑똑히 들은 80세 된 노인(老人)이      들려 준 것이다.

     가족(家族)도 본명(本名)도 알 수 없는 이「종국」이라는 사람이 청주(淸州)에     서 잡혀, 공주(公州)로 압송(押送)되었다. 그가 죽기 전날 은 3월 보름께라 달이     환히 밝았는데, 그는 밤새껏 옥(獄) 문지방에 기대어 기도(祈禱)를 드리고 있었     다. 새벽녘에 그는 문을 방싯 열고 동쪽을 쳐다보며,

ꡒ왜 날이 이렇게 더디 새느냐?ꡓ

   하고 여러 번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총소리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ꡒ저게 좋은 신호다. 곧 나를 부르러 오겠구나!ꡓ

   하고는 열심(熱心)을 배로 하여 다시 기도(祈禱)를 시작하였다.

     몇 분 후에 다시 총소리가 한번 나고 옥문(獄門)이 열리더니, 옥졸(獄卒)들이     사형수(死刑囚)에게 주는 음식(飮食)을 갖다 주었다.  이「종국」은 상을 받고서,     세상에 좋은 것을 그렇게도 많이 창조(創造)하신 것에 대해 오랫동안 하느님께     감사(感謝)를 드리고 나서, 그에게 갖다 준 음식(飮食)을 골고루 맛보고는, 상을     물리고 다시 기도(祈禱)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별안간ꡒ이「종국」을 끌어내라!ꡓ는 호령소리가 들렸다. 그는 곧 일어나서      함께 갇혀있던 교우(敎友)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ꡒ나는 천주의 무한하신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도움으로 이제 천당의복을 누리어      가오. 여러분도 신뢰심을 잃지 말고 나처럼 행하시오!ꡓ

   그가 이렇게 큰 소리로 교우(敎友)들을 열렬히 격려(激勵)하고 있을 때, 형리(刑     吏)들이 그를 재촉하였다. 형리(刑吏)들은 그를 말에 태웠는데, 얼굴을 꼬리 쪽     으로 돌리게 하였다. 그는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형장(刑場)에 끌려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참수(斬首)되었다.

                                                (이상, 본문 상권 455쪽 까지)

    

 

-샤를르 달레 神父 著-

 

 

출처 : 4. 초대교회(初代敎會) 지도자(指導者)들의 순교(殉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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